- - AI·반도체 시대의 통일 해법은 평화경제다

한반도 통일 담론은 오랫동안 군사적 긴장과 이념 대립의 프레임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지금 세계는 완전히 다른 질서로 재편되고 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로봇, 위성정보 체계가 국가 경쟁력은 물론 안보의 성격 자체를 바꾸고 있다. 이런 시대에 통일과 평화를 과거의 언어로만 논하는 것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일이다. 지난 18일 열린 제2차 통일교육 강연에서 국방대학교 정한범 교수가 던진 문제의식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핵심은 분명했다. 이제 한반도 평화전략은 군사적 대치의 관리 차원을 넘어, 기술 패권 시대에 걸맞은 ‘평화경제’의 언어로 재설계돼야 한다는 것이다.
정 교수의 제안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DMZ 평화특구’ 구상이었다. 비무장지대를 단순히 대결과 경계의 공간으로 둘 것이 아니라, 긴장을 낮추고 교류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공간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발상이다. 이 제안은 언뜻 이상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냉정히 따져보면 오히려 현실적인 접근에 가깝다. 오늘날 전쟁은 과거처럼 전선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인공위성, 감시체계, 데이터, AI 기반 분석 능력이 전장의 양상을 좌우하는 시대다. 즉 물리적 충돌의 비용은 더 커졌고, 군사적 모험의 효용은 더 낮아졌다. 그런 점에서 접경 공간을 영구 대치의 상징으로만 방치하는 것은 시대 변화에 둔감한 태도일 수 있다.
정 교수의 진단처럼 21세기 전쟁은 철저한 정보전의 성격을 띤다. 이는 한반도의 안보 현실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과거에는 병력과 화력, 군사분계선의 물리적 충돌 가능성이 중심 변수였다면, 이제는 정보 우위와 기술력, 산업 기반이 억지력의 핵심 요소가 됐다. 한국이 보유한 첨단 정보 인프라와 반도체 제조 역량은 단순한 경제적 성과가 아니라, 상대방이 쉽게 도발을 감행하기 어렵게 만드는 구조적 힘으로 작동한다. 다시 말해 첨단 산업 경쟁력은 더 이상 수출 실적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안보의 본질적 자산이 된 것이다.
여기서 반도체의 의미는 특히 크다. AI 시대의 패권은 결국 연산 능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반도체 공급망에서 갈린다. 설계와 플랫폼이 아무리 중요해도 실제 생산 역량이 없다면 국가 전략은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이 세계 반도체 공급망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그래서 경제적 우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한반도 안보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계산법에도 영향을 미치는 전략 자산이다. 세계가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더 이상 단순한 분단국가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첨단 기술 질서의 핵심 플레이어라는 위상이 안보와 외교의 무게를 함께 키우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 통일전략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 정 교수는 세 가지 가능성을 압축적으로 제시했다. 북한에 의한 체제 통합도, 남한의 군사적 흡수도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남는 길은 경제교류를 통한 평화적 접근이다. 이 판단은 어찌 보면 오래된 상식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진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현실성이 없는 시나리오를 반복적으로 상상하는 대신, 실제 작동 가능한 경로에 정책적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더 책임 있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 개성공단 모델이 다시 언급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물론 과거의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복원하자는 뜻은 아닐 것이다. 시대도 달라졌고, 북한의 태도와 국제환경도 변했다. 하지만 교류와 접촉이 적대와 단절보다 더 큰 변화의 가능성을 만든다는 원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개성공단이 보여준 가장 큰 함의도 여기에 있었다. 남북이 함께 일하고, 생활하고, 일상의 편익을 경험하는 과정 속에서 적대의 벽은 조금씩 균열을 일으킬 수 있었다. 거창한 선언보다 작은 접촉이 더 큰 변화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은 통일 담론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대목이다.
평화경제라는 말도 이 맥락에서 새롭게 읽힐 필요가 있다. 평화경제는 단순히 남북 교역을 늘리자는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긴장 완화가 곧 경제적 기회가 되고, 경제적 협력이 다시 평화를 강화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자는 전략이다. 접경지역은 이 구상에서 매우 중요하다. 특히 포천과 같은 지역은 군사적 제약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평화경제의 실험장이 될 수 있는 이중적 가능성을 갖고 있다. 과거에는 안보 때문에 발전이 제약됐던 공간이, 앞으로는 안보와 교류를 연결하는 전략적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DMZ 평화특구 구상은 지역 발전 전략과도 맞닿는다.
물론 이런 논의가 곧바로 현실이 되기는 쉽지 않다. 북한의 대남 기조 변화, 국제 제재 체계, 미중 전략 경쟁, 국내 정치의 이념 대립 등 넘어야 할 장벽은 분명 많다. 그러나 어려움이 크다고 해서 논의를 멈출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런 복잡한 조건 속일수록 더 정교한 상상력과 장기 전략이 필요하다. 군사 억지력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평화를 설계할 수는 없다. 기술 경쟁력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통일을 이룰 수도 없다. 결국 필요한 것은 안보, 산업, 외교, 지역 발전을 함께 엮는 통합적 접근이다.
정한범 교수의 강연이 던진 메시지는 결국 하나로 모인다. 한반도의 미래는 대결의 관성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기술 패권 시대에 걸맞은 평화경제 전략으로 나아갈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분단 현실 속에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냉전의 사고방식에 갇혀 있을 필요는 없다. 시대가 바뀌면 전략도 바뀌어야 한다. AI와 반도체가 세계 질서를 움직이는 시대라면, 한반도의 평화전략 역시 군사적 억지와 함께 경제적 연결, 기술적 위상, 접경 공간의 재구성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평화는 이상이 아니라 설계의 문제다. 그리고 그 설계는 이제 과거의 틀을 넘어야 한다. DMZ를 평화특구로 바라보는 상상력, 반도체와 AI 경쟁력을 안보 자산으로 읽는 시각, 남북 경제교류를 통일의 현실적 기반으로 다시 보는 판단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결의 언어로는 미래를 만들 수 없다. 한반도의 다음 전략은 평화를 경제와 기술, 지역의 언어로 구체화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전체댓글 0
실시간뉴스
추천뉴스
의정부시
more +단체
more +-
금감원 공시 개편에 삼천당제약 ‘프로핏 쉐어’ 재평가… ‘진가’ 고개를 들다
금융감독원이 제약·바이오 기업의 공시 체계를 전면 개편하고 계약금과 마일스톤, 로열티 및 이익배분 ... -
포천 신북면 ‘포담장터’ 7월 11일 개장… 먹거리·공연·나눔밥상까지 풍성
경기 포천시 신북면에서 지역 주민과 관광객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먹거리 장터가 열린다. 포천 신북면 ... -
[메트로기획] 붓끝에 되살린 소동파의 철학
소동파(蘇軾)의 대표 산문 〈전적벽부(前赤壁賦)〉가 이종훈 포천문화원장의 필치로 대형 서예 작품으... -
[메트로기획] 모수국과 무지랭이골에 대한 연구 ①
경기 의정부시 고산주민센터에서 진행하는 치매예방 프로그램 ‘웃음빵빵 두뇌짱짱’ 수업 시간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