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DMZ는 군사 경계선이 아니라 평화의 실험장이 되어야 한다

한반도 문제를 둘러싼 오래된 관성이 있다. 평화를 말하면 이상론으로 치부하고, 군사적 긴장을 유지하는 것은 현실주의로 포장하는 태도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냉전의 언어를 반복하는 일이 아니라, 분단체제가 누구를 위해 유지되어 왔고 누가 그 비용을 감당해 왔는지를 정직하게 묻는 일이다. 지난 18일 열린 제2차 통일교육 강연에서 제기된 ‘DMZ 평화특구’와 ‘평화경제’ 구상은 바로 그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제 한반도의 미래는 군사적 대결의 상시화가 아니라, 평화를 새로운 사회·경제 질서로 전환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분단은 결코 중립적인 상태가 아니다. 분단은 누군가에게는 안보 산업의 이익이고, 누군가에게는 정치적 동원의 수단이며, 누군가에게는 대외 의존 구조를 정당화하는 장치였다. 그 사이 시민들은 전쟁의 공포를 일상처럼 견뎌야 했고, 접경지역 주민들은 개발 제한과 낙후, 불안정의 비용을 떠안아야 했다. 평화가 단지 총성이 멈춘 상태를 뜻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짜 평화는 분단이 만들어낸 구조적 불평등과 공포의 체제를 넘어서는 데서 시작된다.
그래서 DMZ를 다시 봐야 한다. 지금까지 DMZ는 ‘안보’라는 이름 아래 철저히 군사화된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DMZ는 영원히 대결과 적대의 상징으로만 존재해야 하는가. 오히려 이 공간이야말로 한반도 평화체제로 나아가는 가장 상징적이고도 실질적인 전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비무장지대를 평화특구로 전환하자는 제안은 단순한 개발론이 아니다. 그것은 군사적 통제의 공간을 생명, 교류, 협력, 공존의 공간으로 바꾸자는 정치적 상상력이다. 분단의 상처를 평화의 제도로 바꾸겠다는 발상인 셈이다.
더구나 기술 패권의 시대는 전쟁과 안보의 개념 자체를 바꾸고 있다. 인공지능, 반도체, 위성정보, 로봇 체계가 지배하는 시대에 낡은 전면전 상상력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군사력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이제 안보는 탱크와 포병 숫자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정보 우위, 산업 공급망, 기술 자립, 데이터 통제력이 곧 국가의 전략적 힘이 됐다. 그렇다면 한반도 전략 역시 ‘누가 더 강하게 위협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지속가능한 평화 질서를 설계하느냐’로 이동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한국의 반도체와 AI 경쟁력은 단순한 수출 자산이 아니라 평화전략의 토대가 된다. 문제는 이 기술력이 누구를 위해 쓰이느냐다. 군사적 긴장을 정당화하는 무한경쟁의 논리로만 소비될 것인지, 아니면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체제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자산으로 전환될 것인지가 중요하다. 첨단 기술이 오직 패권 경쟁의 도구로만 기능한다면, 우리는 강대국 경쟁의 하청기지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기술력을 평화경제와 공공성의 기반으로 연결한다면 한국은 전혀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다. 결국 기술의 진보가 평화의 진보로 이어지려면 정치의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
바로 그래서 ‘평화경제’라는 말은 가볍게 들을 수 없는 화두다. 평화경제는 단순히 남북이 물건을 주고받는 수준의 교역 확대가 아니다. 그것은 적대와 봉쇄의 질서를 협력과 상생의 질서로 전환하자는 대안적 발전 전략이다. 긴장을 줄이면 군사비 중심의 소모적 구조를 완화할 수 있고, 교류를 확대하면 접경지역은 낙후의 변방이 아니라 협력의 전진기지로 바뀔 수 있다. 개성공단이 보여준 가능성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경제협력은 돈만 오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인식과 삶의 조건을 바꾸고, 체제 간 접촉을 통해 적대의 감각을 조금씩 허무는 힘을 가진다.
보수적 안보 담론은 늘 이런 시도를 ‘위험한 낭만’으로 몰아왔다. 그러나 정말 비현실적인 것은 무엇인가. 끝없이 군사적 긴장을 키우고, 적대를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며, 분단체제를 영구화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무책임한 비전 아닌가. 전쟁은 누구도 승리하게 하지 않는다. 특히 핵과 첨단무기가 결합한 오늘의 현실에서 한반도 충돌은 공멸적 재앙일 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결의 언어를 반복하는 것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분단 질서가 주는 정치적 이익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진보적 평화전략의 핵심은 분명하다. 첫째, 한반도 문제를 군사 억지 일변도로 다뤄온 냉전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둘째, 대북 적대를 국내 정치 동원 수단으로 삼아온 낡은 프레임을 해체해야 한다. 셋째, 남북 경제협력과 접경지역 평화지대화, 사회문화 교류를 통해 평화를 제도화해야 한다. 넷째, 기술과 산업 전략 역시 강대국 편승 논리가 아니라 자주적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목표 아래 재구성돼야 한다. 평화는 선언으로 오지 않는다. 평화는 구조를 바꾸는 용기와 정책의 지속성 속에서만 온다.
이 과정에서 접경지역의 의미도 새롭게 읽어야 한다. 포천과 같은 지역은 더 이상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안보의 변방’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접경지는 평화의 비용을 일방적으로 떠안는 공간이 아니라, 평화체제 전환의 혜택이 가장 먼저 돌아가는 지역이 되어야 한다. 평화특구, 공공 인프라 확충, 사회적경제 연계, 녹색 산업과 문화교류 기반 조성은 단순한 지역개발이 아니라 분단체제의 공간 질서를 바꾸는 일이다. 평화는 서울의 담론이 아니라 접경지역 주민의 삶에서 먼저 증명돼야 한다.
결국 지금 필요한 것은 ‘강한 안보’라는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어떤 평화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청사진이다. AI와 반도체의 시대에도 한반도가 여전히 대결과 봉쇄의 낡은 프레임에 갇혀 있다면, 기술적 진보는 사회적 후진성과 공존하는 기이한 현실로 남게 될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첨단 기술 역량을 평화경제, 공공성, 자주적 협력 질서와 연결함으로써 전혀 다른 미래를 만들 수 있다.
한반도의 미래는 분단을 영속시키는 정치가 아니라, 평화를 제도화하는 정치에 달려 있다. DMZ를 평화특구로, 접경지를 협력의 거점으로, 기술력을 전쟁 억지가 아닌 공존의 기반으로 전환하려는 상상력은 그래서 중요하다. 진보의 과제는 단지 전쟁 반대를 외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분단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질서를 설계하고, 평화를 시민의 삶 속에 실질적인 이익으로 돌려주는 데 있다. 이제는 분단을 관리하는 시대를 끝내고, 평화를 생산하는 체제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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