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의 접경도시는 오랫동안 국가안보의 최전선이라는 이름으로 규정돼 왔다. 그 결과 이들 지역은 안보의 상징이자 희생의 공간으로 인식되곤 했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지고 있다. 이제 접경은 단지 군사적 긴장의 현장이 아니라, 평화와 교류, 그리고 새로운 지역 발전 전략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다시 읽혀야 한다. 최근 포천시에서 열린 평화통일 시민교실에서 제기된 문제의식은 바로 이 지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포천을 군사 전진기지의 틀에만 가두지 말고, 자주적 평화경제의 거점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제안은 단순한 통일 담론을 넘어 지역의 미래 전략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대진대학교 김후년 교수가 독일 통일의 경험을 소환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독일은 분단을 극복한 대표적 사례로 자주 언급되지만, 우리가 그 역사에서 읽어내야 할 것은 결과보다 과정이다. 동·서독의 통합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사건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에 걸친 긴장완화, 인적 교류, 문화적 접촉, 경제적 연결, 그리고 시민적 합의의 축적이 통일의 토대를 만들었다. 분단은 체제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삶의 문제였고, 따라서 통합 역시 제도만이 아니라 일상의 회복을 필요로 했다. 이 점에서 독일의 경험은 한반도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특히 중요한 것은 긴장완화의 정치가 단순히 군사적 충돌을 줄이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사회 인프라를 정비하며, 시민들로 하여금 국가의 미래를 스스로 설계하는 주체라는 의식을 갖게 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었다. 다시 말해 평화는 외교적 선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평화는 시민이 체감할 수 있는 안정과 기회, 그리고 공공적 신뢰의 구조 속에서 비로소 현실이 된다. 독일 통일의 교훈을 오늘의 포천에 대입해본다면, 평화의 문제는 곧 정주 여건과 지역경제, 인구구조, 도시 비전의 문제와 직결된다고 보아야 한다.
포천이 마주한 현실은 결코 가볍지 않다. 접경지역이라는 지정학적 특수성에 더해 저출생과 고령화, 인구 유출, 산업 기반의 한계라는 다층적 과제가 중첩돼 있다. 군사적 상징성은 강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 오히려 안보 중심의 경직된 구조가 지역 발전의 상상력을 제약해온 측면도 분명히 있다. 이제 포천은 ‘안보를 위해 존재하는 도시’라는 수동적 정체성에서 벗어나, 평화를 통해 성장의 기회를 창출하는 능동적 도시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포천을 자주적 평화경제 교류의 거점으로 육성하자는 제안은 매우 전략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는 단순히 남북 교류의 상징적 통로가 되자는 선언이 아니다. 접경이라는 위치를 제약이 아니라 자산으로 전환하고, 산업단지와 신도시, 문화교류와 생활 인프라, 유휴 군사 자산의 재편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새로운 도시 발전 모델을 만들자는 구상이다. 다시 말해 평화경제란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공간 전략이며, 동시에 인구 소멸 위기에 대응하는 실질적 정책 언어가 될 수 있다.
여기에서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군사 기지의 도시’에서 ‘상생을 설계하는 도시’로의 전환이라는 발상이다. 그동안 접경지역 개발은 종종 안보 논리에 종속되거나 단기적 토목사업의 관점에서 접근돼 왔다. 그러나 앞으로 필요한 것은 단순한 군 지원형 시설 확충이나 하드웨어 중심 개발이 아니다. 포천이 지속가능한 미래도시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평화와 경제, 문화와 정주, 공공성과 민간 활력을 함께 묶는 종합적 비전이 필요하다. 6군단 부지 반환과 같은 유휴 안보 자산 문제 역시 이 틀 속에서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더 세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도시 질서를 만들 것인가 하는 점이다.
평화경제의 핵심은 결국 사람이다. 주민이 체감할 수 없는 평화는 공허하고, 시민의 삶과 연결되지 않는 통일 담론은 지속력을 얻기 어렵다. 포천의 평화 비전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그것은 곧바로 지역 주민의 일자리, 주거 안정, 교육·문화 환경, 소상공인 생태계와 연결돼야 한다. 접경지라는 이유로 감내해온 불안과 규제가, 이제는 오히려 평화 전환의 선도적 혜택으로 보상받아야 한다. 평화가 중앙의 담론이 아니라 지역의 생활정책으로 실현될 때, 비로소 그것은 지속가능한 힘을 갖게 된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자주성의 의미다. 자주적 평화경제라는 표현은 단지 외교적 수사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지역이 스스로의 조건과 가능성을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외부 질서에 종속되는 변방이 아니라 새로운 연결의 중심이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포천이 지닌 지정학적 위치는 단순히 군사적 경계선에 인접해 있다는 사실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장차 한반도 질서가 전환될 경우 가장 먼저 새로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잠재력의 위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포천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 안보의 부담만 말할 것이 아니라, 평화의 기회 또한 함께 말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구상이 단기간에 실현되기는 쉽지 않다. 한반도 정세는 여전히 불안정하고, 남북 관계 역시 구조적 경색을 안고 있다. 국제정치적 변수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차원의 상상력과 준비는 결코 늦출 수 없다. 역사는 준비된 공간에 기회를 준다. 독일의 통일 역시 갑작스러운 사건처럼 보였지만, 실은 오랜 정책적 축적과 사회적 학습의 결과였다. 포천 또한 지금부터 평화경제의 제도적·공간적·사회적 기반을 차근차근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만 미래의 변화가 왔을 때 그것을 현실의 성장 동력으로 전환할 수 있다.
결국 포천의 과제는 분명하다. 분단의 경계에 서 있는 도시에서 평화의 길목을 설계하는 도시로 나아가는 일이다. 이는 단지 지역개발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 미래 질서 속에서 접경도시가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선택이기도 하다. 독일 통일의 교훈은 우리에게 말한다. 평화는 저절로 오지 않으며, 교류와 신뢰, 인프라와 시민적 합의가 축적될 때 비로소 제도가 된다고. 포천이 이 교훈을 품격 있게 자기 언어로 번역해낼 수 있다면, 이 도시는 더 이상 분단의 변방이 아니라 평화경제의 전진기지로 새롭게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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