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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예술을 싣는 방주, 숲에 닿은 사유의 공간

  • 양상현 기자
  • 입력 2026.07.13 21:07
  • 댓글 0
  • 글자크기설정

  • 포천 ‘스페이스 아크’, 16년의 시간이 한 채의 문화로 응결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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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이 걸리는 순간, 건물은 비로소 표정을 갖는다.  

익명의 구조물에 머물던 장소는 그때부터 누군가의 기억에 각인될 이름을 얻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들의 발걸음까지 미리 불러들이는 하나의 세계가 된다. 포천의 숲자락에 들어선 스페이스 아크(Space Ark)가 꼭 그렇다. 13일 오후 외부 간판 설치를 마치며 정식 얼굴을 드러낸 이 공간은 아직 공사 중임에도 이미 완공 이후의 풍경을 선연하게 예감하게 한다. 페인트칠을 앞둔 벽면, 무대 뒤편 홀딩 도어가 들어설 자리, 정교하게 마감되기를 기다리는 바닥과 정돈된 내부의 공기에는 단순한 공정의 분주함을 넘어, 개관 직전의 고요하고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이곳은 새로 지어진 문화공간 한 채로만 설명되기 어렵다.  

스페이스 아크는 대진대학교 윤희철 교수가 16년에 걸쳐 축적해온 시간의 밀도가 현실 공간으로 번역된 결과물에 가깝다. 고모리에서의 10년, 현재 부지에서의 6년. 서로 다른 계절과 장소를 통과하며 숙성된 구상은 이제 하나의 건축을 넘어선 문화적 태도로 응결돼 있다. 다음 달 말 정년퇴임을 앞둔 윤 교수에게 이 공간은 경력의 끝자락에 세우는 기념비가 아니라, 퇴임 이후에도 스스로 머물며 채워갈 사유와 실천의 최종 형식에 가깝다. 다시 말해 스페이스 아크는 완공을 앞둔 건물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의 예술관과 지역 문화에 대한 오랜 신념이 물리적 형태를 얻는 장면이다.


◇ 이름이 미학이 되는 순간  

‘스페이스 아크’라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선언


공간의 이름은 때로 설계도보다 먼저 그 공간의 철학을 드러낸다.  

윤희철 교수는 ‘스페이스 아크’라는 명칭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아크는 최고의 아티스트부터 이제 막 자라나는 꿈나무까지, 예술과 관련된 모든 것을 담아보자는 의미의 방주입니다. 스페이스는 다양한 생각과 철학적 개념을 담아낼 수 있는 건축학적 공간을 뜻합니다.”


이 짧은 설명에는 이곳이 지향하는 질감이 압축돼 있다.  

특정 장르의 권위만을 강조하는 닫힌 예술의 성역도 아니고, 일상적 취향만을 가볍게 소모하는 생활문화의 쉼터도 아니다. 기성의 예술가와 미래의 창작자, 공연과 전시, 체류와 교류, 전문성과 친밀감이 한 자리에 공존하는 복합적 예술의 그릇. 처음에는 ‘디 아크(The Ark)’라는 이름도 검토했지만, 그는 보다 열려 있고 덜 규정적인 감각을 위해 최종적으로 ‘스페이스 아크’를 선택했다.


 “누구나 편하게 다가올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랐습니다.”


이 말은 담백하지만, 그 안에는 공간을 대하는 윤 교수의 태도가 선명하다.  

예술을 높이 세우되 멀리 두지 않고, 품격을 유지하되 배타성으로 흐르지 않게 하며, 문턱 대신 초대의 감각을 택하겠다는 선택이다. 스페이스 아크의 이름은 그래서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이 공간이 세상과 맺고자 하는 관계의 방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 미완의 공정, 완성의 예감  

비어 있는 무대 위로 먼저 도착하는 장면들


현재 스페이스 아크 내부는 준공을 향한 마지막 정리의 시간 속에 있다.  

내부 페인트 작업을 위한 밑작업은 사실상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고, 무대 뒤편 홀딩 도어 제작을 위한 정밀 실측도 끝났다. 무대 바닥과 홀딩 도어 설치가 완료되면 이달 말 준공을 위한 핵심 하드웨어는 갖춰지게 된다. 그러나 이 공간의 인상을 단지 공정률이나 일정표로 환원하는 것은 어쩐지 충분하지 않다.


이곳의 진짜 분위기는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오히려 또렷해진다.  

아직 연주가 시작되지 않은 무대 앞에 잠시 서 있으면, 그 빈자리 위로 첫 음의 울림과 첫 박수의 파장이 먼저 떠오른다. 좋은 문화공간은 완공 이후에만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완공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이미 자신만의 기압을 만들어낸다. 스페이스 아크 역시 그렇다. 지금은 비어 있지만 공허하지 않고, 정리 중이지만 어수선하지 않다. 오히려 이 미완의 단계가야말로 앞으로 이곳을 채울 시간들의 윤곽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 외벽에 새겨질 음악의 기억  

한국 가곡의 시간들을 품는 타일 아카이브


스페이스 아크의 인상은 실내에만 머물지 않는다.  

건물 외부 필로티형 주차장 벽면에는 향후 ‘한국 가곡을 빛낸 아티스트들’을 기리는 타일 벽화가 들어설 예정이다. 바리톤 김동규, 테너 엄정행을 비롯해 음악가, 작곡가, 시인 등 약 220명의 친필 사인과 디자인이 담긴 타일이 이 벽면을 채우게 된다.


이 계획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장식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데 있다.  

한 장 한 장의 타일은 곧 이름이며, 이름은 곧 기록이다. 한국 가곡과 음악사의 한 흐름을 구성해온 인물들의 흔적이 포천의 한 문화공간 외벽에 새겨진다는 사실은, 이 장소가 단지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만이 아니라 ‘무엇을 기억하게 할 것인가’까지 고민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공간은 흔히 내부 프로그램으로 평가되지만, 오래 기억되는 장소는 대개 자신만의 상징을 품고 있다. 스페이스 아크에게 그 상징은 건축적 외관보다도, 예술의 계보를 한 벽면에 축적하는 이 아카이브적 상상력일 수 있다.


윤희철 교수는 이를 통해 포천을 넘어 전국적으로 회자되는 문화 이슈를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그 바람은 과장이라기보다 오히려 정확한 감각에 가깝다. 오늘날 지역 문화공간이 지속적인 존재감을 얻기 위해서는 좋은 프로그램만큼이나 강력한 이야기의 형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타일 벽화는 스페이스 아크가 스스로를 기억되게 만드는 가장 정교한 서사 장치가 될 가능성이 높다.


◇ 머무는 예술을 위한 구조  

갤러리와 카페, 무대와 대기실, 그리고 복층의 밤


준공 이후 메인홀은 데크를 통해 주변 숲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 공간은 평소에는 갤러리와 카페로 기능하고, 공연이 있는 날에는 무대로 전환된다. 여기에는 단순한 공간 활용의 효율을 넘어, 예술이 삶의 리듬 안으로 천천히 스며들기를 바라는 구상이 담겨 있다. 전시를 보고 잠시 앉아 차를 마시고, 공연이 끝난 뒤 여운을 나누며 조금 더 머무는 장소. 즉, 이곳은 특정 이벤트가 벌어지는 순간만 빛나는 곳이 아니라, 아무 일도 없는 날에도 방문의 이유를 가질 수 있는 공간으로 설계됐다.


무대는 관객 친화적으로 두 단 높여 설치되고, 그 옆과 아래에는 남녀 대기실과 악기 보관실이 들어선다.  

이는 미적 완성도 이전에, 실제 공연 현장의 요구를 정확히 이해한 설계다. 무대 위에 오르는 순간만이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의 시간, 준비와 대기, 이동과 정리의 동선까지 예술의 일부로 간주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세련된 공연장은 종종 화려한 외관으로 기억되지만, 오래 사랑받는 공연장은 대개 무대 뒤의 논리까지 잘 작동하는 장소다.


그중에서도 스페이스 아크의 인상을 깊게 만드는 것은 복층 구조의 게스트하우스다.  

주방과 거실, 고급 침실을 갖춘 이 공간은 단순한 숙박시설로 보기 어렵다. 오히려 초청된 예술가들이 머무르며 밤늦게까지 워크숍을 이어가고, 공연 이후에도 대화의 흐름을 끊지 않은 채 다음 작업을 상상할 수 있도록 설계된 체류형 창작의 방에 가깝다. 예술은 종종 무대 위 한 시간보다 그 전후에 더 깊어진다. 함께 머물며 나누는 식사와 담소, 리허설 이후의 침묵, 숲을 바라보는 다음 날 아침의 감각이 때로는 공연 그 자체만큼 중요한 잔향을 남긴다. 스페이스 아크는 바로 그 ‘머무는 시간의 가치’를 공간 안으로 끌어들인다.


여기에 장애인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경사로(램프) 설치까지 반영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품격과 공공성, 미감과 실용, 개방성과 완성도를 한 구조 안에서 함께 고민한 흔적이 읽힌다. 이 공간의 미덕은 화려한 주장보다도, 세부에서 드러나는 배려의 방식에 있다.


◇ 첫 울림 이후의 시간들  

9월 5일 개관, 그리고 연말까지 이어질 예술의 호흡


스페이스 아크의 첫 공식 무대는 9월 5일 개관식과 소규모 음악회다.  

이를 위해 다음 달 초에는 연주용 피아노가 반입될 예정이다. 텅 빈 공간에 가장 먼저 악기가 들어선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그 순간부터 이곳은 더 이상 마감 중인 건물이 아니라, 울림을 준비하는 장소가 된다.


개관 이후의 프로그램은 이미 연말까지 촘촘하게 설계돼 있다.  

미술 전시는 2주 단위 릴레이 형식으로 이어지고, 12월 한 달간은 크리스마스 특별전과 음악회가 예정돼 있다. 여기에 수준 높은 클래식 공연과 명사 특강, 젊은 연주자들의 무대가 더해진다. 첼리스트 여윤수의 독주회 역시 기대를 모으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다.


중요한 것은 이 일정들의 화려함보다, 그것들이 만들어낼 지속적인 리듬이다.  

스페이스 아크는 반짝이는 개관 이벤트의 일회성 주목에 의존하기보다, 계절마다 다시 찾고 싶은 이유를 차곡차곡 쌓는 공간을 지향한다. 오늘 본 전시가 다음 방문을 부르고, 한 번의 공연이 다음 계절의 프로그램을 기다리게 만드는 방식. 문화공간의 진정한 힘은 결국 방문 횟수의 누적이 아니라 기억의 재방문에서 비롯된다. 스페이스 아크는 바로 그 지점을 겨냥하고 있다.


◇ 자연을 배경으로, 도시를 다시 상상하는 일  

“포천 국제 예술제를 키우는 것이 궁극적인 모토”


윤희철 교수의 구상은 이 한 채의 건물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가 최종적으로 그리고 있는 그림은 포천의 자연 풍광과 예술을 결합한 ‘포천 국제 예술제’다.


 “강원도 평창의 대관령음악제처럼, 포천이 가진 우수한 자연풍광을 배경으로 ‘포천 국제 예술제’를 키워내는 것이 궁극적인 모토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포부라기보다 지역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에 가깝다.  

포천은 오래전부터 좋은 자연을 가진 도시로 불려왔지만, 그 풍경이 문화적 브랜드로 정교하게 전환된 경험은 아직 충분치 않았다. 스페이스 아크는 바로 그 간극을 메우려는 시도다. 자연을 단지 배경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머물고 사람들이 찾아오는 장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도시의 감각 자체를 바꾸려는 것이다.


윤 교수는 또 이렇게 말한다.


 “포천시가 진정한 인문·문화도시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외부 예술인들이 찾아와 인정하는 문화 인프라가 필수적입니다.”


이 문장은 지역 문화의 본질을 정확히 겨냥한다.  

도시는 스스로를 문화도시라 부른다고 해서 곧장 문화적 위상을 획득하지 않는다. 외부의 예술가와 관객이 실제로 찾아오고, 머물고, 다시 이야기할 때 비로소 도시는 문화적 신뢰를 얻게 된다. 그런 점에서 스페이스 아크는 단지 지역 주민의 문화 향유처 하나를 더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포천이라는 도시가 자신을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를 묻는 작은 그러나 진지한 실험장이다.


◇ 한 사람의 집념에서, 한 도시의 감각으로


물론 어떤 문화공간도 이상만으로 유지되지는 않는다.  

윤희철 교수는 현재 많은 이들의 후원 속에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며,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기업들의 메세나 정신과 지속적인 관심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결국 스페이스 아크는 한 개인의 오랜 꿈에서 출발했지만, 앞으로는 지역사회와 예술가, 관객과 후원자들이 함께 지탱해야 할 공적 감각의 장소가 될 것이다.


스페이스 아크는 아직 완공 전이다.  

그러나 어떤 공간은 문을 열기 전에 이미 이야기를 시작한다. 16년 동안 한 사람이 포기하지 않고 밀고 온 시간, 한국 가곡의 기억을 벽에 새기려는 의지, 숲과 예술, 체류와 교류를 하나의 문장으로 엮으려는 상상력이 이곳에서 동시에 호흡하고 있다.


간판이 걸린 날, 건물은 이름을 얻었다.  

이달 말 준공을 지나 9월 5일 첫 무대가 시작되면, 그 이름은 곧 표정이 되고 분위기가 되고 기억이 될 것이다. 누군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예상치 못한 울림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한 번 더 뒤를 돌아보는 순간, 스페이스 아크는 비로소 진짜 완성에 가까워질지 모른다.


포천의 숲 가까운 곳에서, 예술의 모든 것을 싣겠다는 한 척의 방주가 이제 조용히 출항을 준비하고 있다.


메트로포천 양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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