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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오래된 소리, 아직 오지 않은 미래

  • 양상현 기자
  • 입력 2026.03.25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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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야금병창을 다시 듣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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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예술을 말할 때 우리는 종종 두 가지 태도 사이를 오간다. 하나는 지나치게 엄숙한 보존의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의 감각에 맞춘 손쉬운 소비의 태도다. 전자는 전통을 움직이지 않는 유물처럼 다루고, 후자는 전통의 시간과 맥락을 가볍게 덜어낸다. 하지만 살아 있는 전통은 그 어느 쪽에도 머물지 않는다. 전통은 지켜야 할 과거이면서 동시에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현재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이 선보이는 ‘가야금병창의 비상 - 병창, 과거·현재·미래’는 그 단순하지만 어려운 명제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무대다.


가야금병창은 우리 전통음악 안에서도 유난히 복합적인 장르다. 가야금을 타며 노래한다는 형식만으로 설명하기에는 그 안에 담긴 층위가 깊다. 선율과 장단, 말맛과 성음, 연주와 서사가 한 몸처럼 엮이며, 한 사람의 손끝과 목청이 동시에 음악의 중심이 된다. 그래서 병창은 단지 판소리의 변주이거나 반주의 연장이 아니다. 그것은 독자적인 질서와 감각을 지닌 예술이다. 다만 오랜 시간 병창은 보다 널리 알려진 장르의 곁에서 상대적으로 덜 조명돼 왔다. 익숙함의 바깥에 있었기에, 그 가치 또한 충분히 말해지지 못한 측면이 있다.


이번 공연이 반가운 이유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병창을 부수적 장르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시간으로, 하나의 온전한 역사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특히 1906년 유성기 음반에 남은 박팔괘 명창의 ‘산양가’를 오늘의 무대에서 재현한다는 대목은 상징적이다. 유성기 음반 속 소리는 단순한 옛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의 호흡이 물리적으로 남아 있는 드문 흔적이며, 오늘의 우리가 잃어버린 감각을 되짚게 하는 청각적 사료다. 그 소리를 다시 꺼내 듣는다는 것은 과거를 회고하는 일이 아니라, 장르의 기원을 현재의 감각으로 재독해하는 일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이 공연이 복원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통의 가치는 옛것을 그대로 옮겨놓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전통이 시대를 지나며 어떻게 달라졌는지, 무엇을 품고 무엇을 바꾸어 왔는지를 드러낼 때 더 분명해진다. 그런 점에서 이번 무대가 북한 가야금병창까지 함께 조명한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같은 뿌리를 공유하면서도 남과 북에서 다른 성음, 다른 악기 체계, 다른 미감으로 전개된 병창의 흐름은 전통이 결코 단일한 원형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전통은 늘 역사 속에서 다시 만들어진다. 분단 역시 예술의 형식에 흔적을 남겼고, 병창은 그 흔적을 고스란히 품은 장르 가운데 하나다.


정가병창, 민요병창, 창작적 형식의 무대까지 아우르는 구성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통예술은 흔히 계승과 보존의 언어로만 설명되지만, 실제로 전통을 오래 살게 하는 힘은 확장과 해석에 있다. 과거를 정확히 배운 뒤 그것을 오늘의 무대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게 할 것인지 묻는 순간, 전통은 비로소 현재형이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현대화가 아니라, 전통의 문법을 이해한 뒤 그 안에서 새 길을 찾는 태도다. 형식만 빌려오는 얕은 차용이 아니라, 시간의 깊이를 통과한 창조가 필요하다.


가야금병창은 바로 그런 가능성을 지닌 장르다. 병창은 소리와 연주가 긴밀하게 맞물려 있어 해석의 여지가 넓고, 음악적 구조 또한 생각보다 유연하다. 그렇기에 과거의 원형을 탐구하는 데도 적합하고, 동시대 무대 언어와 만나는 실험에도 열려 있다. 12현 전통 가야금과 25현 개량 가야금이 한 무대에서 만나는 장면은 그 상징적 장면이 될 것이다. 전통의 몸체와 현대의 확장이 충돌이 아니라 공존의 방식으로 만날 수 있다면, 우리는 전통을 둘러싼 오래된 이분법을 조금은 벗어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번 공연은 교육기관이 전통예술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답처럼 읽힌다. 예술 교육은 단순한 전수가 아니다. 이미 정리된 것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데 머무르면 전통은 살아남지 못한다. 반대로 과거의 축적 없이 새로움만 강조하면 전통의 뿌리는 금세 얕아진다. 결국 필요한 것은 깊이 배우고, 정확히 이해하고, 그 위에서 다시 질문하는 일이다. 한예종 전통예술원의 이번 무대는 그 세 가지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오래된 소리를 공부하되 박제하지 않고, 오늘의 무대로 불러오되 가볍게 소비하지 않는 방식 말이다.


우리는 종종 전통예술을 ‘지켜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전통은 지키는 것만으로 살아남지 않는다. 다시 부르고, 다시 연주하고, 다시 해석해야 비로소 현재의 예술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가야금병창의 120년을 한 무대에 세우려는 이번 시도는 단순한 발표회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오래된 소리를 현재의 청중에게 다시 건네는 일이며, 동시에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병창을 상상하게 하는 일이다.


결국 전통예술의 미래는 화려한 수사나 제도적 구호보다, 이런 성실한 무대 위에서 조금씩 만들어질 것이다. 가장 오래된 기록에서 출발해 가장 새로운 가능성으로 나아가려는 시도, 바로 그 사이에서 전통은 늙지 않는다. 가야금병창을 다시 듣는다는 것은 어쩌면 과거를 기리는 일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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