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천 년 역사를 품은 의정부, '땅이름 얼 세우기'가 던지는 질문
이름은 기억이다.
어떤 장소에 이름이 붙는 순간, 그 이름은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을 담는 그릇이 된다. 세대를 거쳐 불리고 전해지면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을 넘어 역사가 된다. 그러나 개발의 물결이 밀려올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이 땅이름이다. 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도로가 뚫리고, 행정 구역이 개편되면서 수백 년, 수천 년을 이어온 이름들이 조용히 지워진다.
29일 오후, 의정부에서 그 이름들을 되살리려는 사람들이 모였다.
◇ 군사도시 너머의 의정부
의정부. 많은 사람들에게 이 도시는 미군 기지와 부대찌개, 그리고 서울 북쪽의 위성도시로 기억된다. 한국전쟁 이후 군사 시설이 집중되면서 형성된 도시 이미지가 의정부의 정체성을 오랫동안 규정해왔다.
그러나 땅이름 얼 세우기 총연합회(땅얼연)가 제시하는 의정부는 다르다. 귀락마을의 5천 년 전 삼한시대 고인돌 군락지, 기원전 18년 백제 초기 성터로 추정되는 하북위례성(이성산성). 이 땅은 군사도시가 되기 훨씬 전부터 사람들이 살았고, 역사가 쌓였고, 이름이 붙었다.
5천 년의 역사와 70년의 군사도시 이미지. 어느 쪽이 의정부의 진짜 정체성인가. 답은 명확하다. 70년은 5천 년의 일부일 뿐이다. 군사도시 이전에 의정부는 고대사의 현장이었다.
◇ 고인돌과 위례성이 말하는 것
귀락마을 고인돌 군락지와 하북위례성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이 땅에 살았다는 증거다. 누군가의 무덤이자, 공동체의 기억이다. 그것을 만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믿었는지, 어떤 공동체를 이루었는지를 담고 있다.
하북위례성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품고 있다. 백제의 초기 성터로 추정된다는 것은 이 땅이 한반도 고대 국가 형성의 현장이었을 가능성을 말한다. 위례성은 백제의 첫 번째 수도와 연결되는 이름이다. 그 이름이 의정부 땅에 남아있다는 것은 이 지역이 한국 고대사의 변방이 아니라 중심이었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이 유적들이 경제 개발 논리에 밀려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지적은 그래서 심각하다. 한번 사라진 유적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파트가 들어선 자리에서 고인돌을 복원할 수는 없다.
◇ 조례의 의미와 한계
2023년 10월 발의된 '의정부시 정체성 함양을 위한 지명 사용에 관한 조례'는 작지만 중요한 진전이다.
역사·문화 지원 체계를 문화원 중심에서 시민단체로 확대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땅얼연 같은 시민 주도의 역사 찾기 운동이 제도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조례는 시작일 뿐이다. 강선영 의정부시의원이 지적했듯이 "조례 제정 이후 실제 예산 지원과 행정적 실행력을 확보하는 것이 향후 과제"다. 조례가 있어도 예산이 없으면 종이 위의 약속에 그친다. 행정의 의지가 뒷받침될 때 조례는 살아있는 제도가 된다.
◇ 개발과 보존, 해묵은 갈등의 새로운 국면
의정부시는 지금 대규모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반환 미군기지(CRC) 개발, 예비군 훈련장 이전. 오랫동안 개발이 제한됐던 땅들이 열리고 있다. 경제적 기회이자 도시 재생의 가능성이다. 그러나 그 땅 아래, 그 땅 위에 역사가 있다.
호원동 일대 하북위례성 추정지와 귀락마을 선돌. 이것들이 개발 과정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느냐가 의정부의 역사 의식을 보여주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
개발과 보존은 반드시 대립하지 않는다. 역사 유적을 보존하면서 그것을 도시의 자산으로 활용하는 방식이 있다. 고인돌 군락지를 공원으로 조성하고, 위례성 추정지를 역사 탐방 코스로 만들고, 그것이 도시의 정체성이자 관광 자원이 되는 것. 경제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가 함께 살아남는 길이다.
김원기 의정부시장 예비후보가 "눈앞의 경제적 이익 때문에 돌멩이 하나, 기왓장 하나에 담긴 조상의 정기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은 그 방향을 가리킨다. 선거를 앞둔 발언이지만, 그 내용은 선거와 무관하게 옳다.
◇ 땅이름이 살아야 정체성이 산다
땅이름은 왜 중요한가.
이름은 그 장소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담는다. 귀락마을이라는 이름이 살아있는 한, 그 마을에 고인돌이 있었다는 기억도 살아있다. 하북위례성이라는 이름이 불리는 한, 그 땅에 백제의 흔적이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이름이 사라지면 기억도 사라진다. 새로운 아파트 단지 이름이 붙고, 새로운 도로명이 생기면서 수천 년의 이름이 지워진다. 그 이름을 아는 마지막 세대가 세상을 떠나면, 그 기억은 영원히 사라진다.
땅얼연이 하는 일은 그 사라짐을 막는 것이다. 이름을 기록하고, 연구하고, 알리고, 제도적으로 보호하는 것. 화려하지 않고 주목받지 못하는 일이지만, 그것이 없으면 의정부의 5천 년 역사는 개발의 흙먼지 속에 묻힌다.
◇ 경기북부 정체성 회복의 출발점
이번 총회가 의정부역에서 열렸다는 것이 상징적이다.
의정부역은 양주, 동두천, 포천, 연천을 잇는 경기북부의 교통 허브다. 의정부의 역사 찾기가 단일 도시의 운동을 넘어 경기북부 전체의 정체성 회복 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는 지점이다.
경기북부는 오랫동안 수도권의 변방으로, 군사 규제의 희생지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이 땅의 역사는 그 인식보다 훨씬 깊고 풍부하다. 고인돌이 있고, 위례성이 있고, 수천 년의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그 역사를 발굴하고 알리는 것이 경기북부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세우는 방법이다.
신동명 땅얼연 회장이 "의정부를 기점으로 경기북부와 전국에 지회를 설치하겠다"고 밝힌 것은 그 확산의 의지다. 한 도시의 역사 찾기가 지역 전체의 자긍심 회복으로 이어지는 것. 그것이 땅이름 운동이 가진 가능성이다.
◇ 6월 이후를 기대하며
땅얼연은 6월 지방선거 이후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논문을 발표하고 지회 확장에 나설 계획이다.
선거 이후라는 시점이 의미 있다. 역사 보존은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지속적인 연구와 시민 운동으로 이루어진다. 선거가 끝나도 계속되는 운동이어야 한다. 어떤 시장이 당선되든, 어떤 정당이 집권하든, 의정부의 5천 년 역사는 보존되어야 한다.
그 지속성을 만드는 것이 시민 운동의 역할이다. 행정이 바뀌어도 시민이 기억하면 역사는 살아남는다.
땅이름은 기억이다. 귀락마을의 고인돌이, 하북위례성의 돌 하나가 수천 년의 기억을 담고 있다. 그 이름이 불리는 한, 그 기억은 살아있다. 의정부의 5천 년이 개발의 흙먼지 속에 묻히지 않도록, 땅이름을 지키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전체댓글 0
실시간뉴스
추천뉴스
의정부시
more +단체
more +-
금감원 공시 개편에 삼천당제약 ‘프로핏 쉐어’ 재평가… ‘진가’ 고개를 들다
금융감독원이 제약·바이오 기업의 공시 체계를 전면 개편하고 계약금과 마일스톤, 로열티 및 이익배분 ... -
포천 신북면 ‘포담장터’ 7월 11일 개장… 먹거리·공연·나눔밥상까지 풍성
경기 포천시 신북면에서 지역 주민과 관광객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먹거리 장터가 열린다. 포천 신북면 ... -
[메트로기획] 붓끝에 되살린 소동파의 철학
소동파(蘇軾)의 대표 산문 〈전적벽부(前赤壁賦)〉가 이종훈 포천문화원장의 필치로 대형 서예 작품으... -
[메트로기획] 모수국과 무지랭이골에 대한 연구 ①
경기 의정부시 고산주민센터에서 진행하는 치매예방 프로그램 ‘웃음빵빵 두뇌짱짱’ 수업 시간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