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혁인가 왜곡인가 — 한돈산업 등급제 개편 논의의 본질

제도는 시대를 담는 그릇이다.
그릇이 내용물보다 작아지면 넘친다. 그릇이 내용물보다 커지면 흔들린다. 2013년 시행된 돼지 도체 등급제는 당시의 시대적 요구를 담아 만들어진 그릇이었다. 그러나 13년이 지난 지금, 그 그릇 안의 내용물은 완전히 달라졌다. 문제는 그릇을 바꿔야 하느냐가 아니다. 어떤 그릇으로, 어떤 방식으로 바꾸느냐다.
◇ 2013년 개편의 시대적 맥락
2011년 구제역은 한돈산업에 전례 없는 충격을 안겼다.
대규모 살처분 이후 빠른 회복이 진행되면서 역설적으로 과잉 공급이 예고됐다. 정부와 생산자단체는 두 가지 축으로 대응했다. 하나는 모돈 감축을 통한 공급 억제였고, 다른 하나는 등급제 개편을 통한 품질 유도였다.
당시 개편의 핵심은 단순화와 기준 강화였다. 7단계였던 등급 체계를 4단계로 줄이고, 도체중 기준을 하향 조정했다. 복잡했던 규격등급과 육질등급의 이원화 구조를 통합 평가로 전환했다. 표면적으로는 품질 중심의 개편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양을 줄여 가격을 지키는" 정책적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당시로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공급 과잉의 위기 앞에서 생산량을 억제하고 균일한 품질을 유도하는 것은 산업 안정화의 필요조건이었다. 그러나 그 선택이 13년 후에도 유효한가. 그것이 지금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다.
◇ 13년 동안 무엇이 달라졌나
한돈산업의 변화는 단순한 양적 성장이 아니다. 질적 전환이다.
육종 능력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PSY(모돈 두당 연간 이유 자돈 수)가 상승하고, 성장 속도가 개선되고, 사료 효율이 향상됐다. 대형종과 린미트(lean meat) 중심의 육종이 자리를 잡았다. 같은 마릿수라도 총 생산량은 과거보다 훨씬 크다. 2013년의 기준으로 2026년의 돼지를 평가하는 것은, 10년 전 자동차 배기가스 기준으로 지금의 전기차를 평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장 구조도 달라졌다. 삼겹살 중심이던 소비가 다양한 부위로 확대됐다. 대형 유통과 가공육 시장이 커졌고, 수입육과의 경쟁이 심화됐다. 농가 구조는 규모화·기업화로 재편됐고, PRRS 등 질병 리스크는 상시화됐다.
이 변화들이 말하는 것은 하나다. 2013년의 등급 기준은 2026년의 산업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 등급제 개편 요구의 두 얼굴
지금 등급제 개편 요구가 나오는 배경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논리가 혼재한다.
첫 번째는 정당한 요구다. 유전능력은 올라갔는데 등급 기준은 과거 구조에 머물러 있다는 현실의 괴리. 지금 돼지는 더 크고 빨리 크는데 기준은 예전 기준이라는 불합리. 이것은 산업의 발전을 제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다.
두 번째는 위험한 요구다. 가격이 하락하면 등급 기준 강화를 요구하고, 가격이 상승하면 기준 완화를 요구하는 패턴. 등급제를 수급 조절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다. 이것이 문제다. 등급제가 시장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임기응변식 도구가 된다면, 농가는 생산 계획을 세울 수 없고, 육종 방향은 왜곡되고, 산업 전체의 신뢰도가 무너진다.
지금 논의에서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것이 핵심이다. 정당한 요구에 응답하되, 위험한 요구에 끌려가지 않는 것. 그것이 이번 개편 논의가 넘어야 할 첫 번째 허들이다.
◇ 임기응변의 유혹, 신중함의 가치
등급제 개편의 역사를 돌아보면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위기가 오면 개편 논의가 시작된다. 수급 불안, 가격 폭락, 질병 피해. 이런 상황이 닥칠 때마다 등급제가 해결책으로 소환된다. 그러나 위기 대응용으로 설계된 등급제는 위기가 지나면 또 다른 문제를 만든다. 농가는 기준이 바뀔 때마다 생산 방향을 수정해야 하고, 그 혼란의 비용은 고스란히 산업이 떠안는다.
질병적 위험이 있고 그 피해로 공급이 불안한 지금, 등급제 개편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공감과 서두름은 다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빠른 개편이 아니라 올바른 개편이다.
올바른 개편의 조건은 명확하다. 수급 조절 도구가 아닌 품질 기준으로 접근해야 한다. 현재 돼지의 유전능력과 실제 출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소비자가 원하는 규격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 그리고 최소 10년 이상 유지 가능한 장기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
◇ 사회적 공유가 필요한 이유
등급제는 생산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농가의 생산 방향을 결정하고, 도축장의 판정 기준을 정하고, 유통업체의 거래 기준이 되고, 소비자가 먹는 돼지고기의 품질을 규정한다. 산업 전체가 연결된 기준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편 논의는 생산자단체와 정부만의 협의로 끝나서는 안 된다. 도축업계, 유통업계, 소비자, 그리고 육종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하는 사회적 공유의 과정이 필요하다. 각자의 이해관계가 다르고, 각자가 보는 문제의 각도가 다르다. 그 다양한 시각이 모일 때 비로소 13년을 버틸 수 있는 기준이 만들어진다.
마치 현재가 최선인 것처럼 변화에 허들을 놓는 것도 위험하지만, 위기를 빌미로 충분한 논의 없이 서두르는 것도 위험하다. 두 극단 사이에서 신중하고 포괄적인 논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지금 이 시점에 필요한 리더십이다.
◇ 개편 자체보다 방향 설정이 먼저다
결론은 단순하다.
등급제 개편은 필요하다. 그러나 방식이 문제다.
과거처럼 수급 위기 대응용으로 접근하면 다시 왜곡이 발생한다. 지금은 산업 구조, 소비 트렌드, 육종 능력을 함께 반영한 재설계의 단계다. 13년 전의 위기 대응이 아니라, 향후 13년을 이끌 기준을 만드는 작업이다.
그 작업은 서두를수록 나빠진다. 충분한 데이터를 모으고,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목소리를 듣고, 방향을 합의한 뒤에 기준을 설계해야 한다. 그 과정이 길고 지루하더라도, 그것이 한돈산업이 다음 13년을 안정적으로 걸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등급제는 산업의 나침반이다. 나침반이 수시로 방향을 바꾸면 항해자는 길을 잃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나침반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오랫동안 믿고 따를 수 있는 나침반을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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