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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600년이 다시 걷는다

  • 양동원 기자
  • 입력 2026.04.07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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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암사지 왕실축제는 잠든 유적을 깨우고, 세계유산의 가치를 오늘의 체험으로 바꾼다

회암사지 왕실축제.jpg


왕이 걸었던 길이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말년을 보낸 곳, 회암사. 고려 말 동아시아 최대 사찰로 불렸던 그 자리는 지금 터만 남아 있다. 돌과 흙, 기단과 초석 사이에 600년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유적 같지만, 사실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자리다. 문제는 그 이야기를 오늘의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듣게 하느냐다.


4월 17일부터 19일까지 열리는 제9회 양주 회암사지 왕실축제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축제의 이름처럼, 잠들어 있던 시간이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걸음은 과거를 재현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회암사지를 세계유산의 언어로, 또 오늘 시민의 체험으로 다시 번역해내려 한다.


회암사지는 단순한 지역 유적이 아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우선등재목록에 오른 곳이고, 오는 2026년 7월 부산에서 열리는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를 앞두고 그 가치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학술적으로는 이미 충분히 중요한 장소다. 하지만 세계유산의 가치는 논문과 보고서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 유산이 지역에서 어떻게 기억되고, 어떻게 살아 움직이며, 시민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함께 증명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축제는 단순한 부대행사가 아니라, 유산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방식이 된다.


유적지가 축제가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안내판은 정보를 전달하고, 학술 발표는 의미를 해석한다. 그러나 축제는 역사를 몸으로 경험하게 만든다. 텍스트로 읽던 왕실의 시간이 거리 위로 걸어 나오고, 먼 과거의 절터가 오늘의 시민과 만나는 장면이 만들어진다. 이번 축제의 핵심 프로그램인 어가행렬은 바로 그 상징이다. 600년 전 왕의 행렬이 오늘의 양주 시가지를 다시 지나갈 때, 시민은 단순한 관람객이 아니다. 그 장면을 바라보는 순간, 그리고 그 길을 함께 채우는 순간, 모두가 역사 한복판의 참여자가 된다. 유적은 그때 비로소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도시 이야기로 돌아온다.


이번 축제가 더 눈에 띄는 이유는 ‘보는 축제’에서 ‘함께 만드는 축제’로 방향을 분명히 잡았기 때문이다.  

어가행렬에 시민이 직접 참가하고, 전야제에서는 분야별 시민대표 13인이 축제의 문을 연다. 지역 예술인들이 거리 공연을 채운다. 이 변화는 단순한 형식의 조정이 아니다. 축제의 주인을 다시 시민에게 돌려주는 일이다. 구경꾼은 행사가 끝나면 흩어지지만, 참여자는 기억을 남긴다. 내가 그 행렬 안에 있었고, 내가 그 무대의 일부였다는 감각은 축제를 개인의 경험으로 바꾼다. 그 경험이 애착을 만들고, 애착이 축제를 지속시킨다. 지역축제가 오래 살아남으려면 결국 지역민이 자기 축제로 느껴야 한다.


주제공연의 구성도 흥미롭다.  

창작판소리와 뮤지컬, 미디어아트, 전통 무예와 무용이 한 무대에서 만난다. 전통과 현대의 결합은 이제 흔한 시도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섞느냐다. 회암사지의 역사와 이성계의 말년, 왕실과 사찰의 기억을 판소리의 울림으로 풀고, 그것을 미디어아트의 시각 언어와 전통 무예의 몸짓으로 확장한다면 이야기는 더 넓은 감각으로 전달될 수 있다. 유적의 서사가 설명문이 아니라 소리와 빛, 움직임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특히 단일 공연에서 양일간 확대 운영으로 바뀐 것은 더 많은 관람 기회를 열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좋은 프로그램은 한 번으로 끝내기 아깝다.


새롭게 도입된 불교문화 체험도 눈길을 끈다.  

선명상 체험과 사찰음식 강연은 회암사지가 지닌 사찰 유산의 성격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주목할 점은 종교적 접근보다 문화적 접근에 무게를 둔다는 것이다. 불교 신자만을 위한 체험이 아니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생활문화 프로그램으로 풀어냈다는 점이 현명하다. 회암사지를 이해하려면 불교문화의 맥락을 빼놓을 수 없지만, 종교적 진입장벽이 높아지면 오히려 대중은 멀어진다. 반대로 명상과 음식, 생활의 언어로 풀어내면 훨씬 많은 사람이 편안하게 다가설 수 있다. 그렇게 들어온 사람들이 결국 역사와 유산의 의미까지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다.


이번 축제의 또 다른 장점은 ‘런케이션’이라는 개념이다.  

즐기면서 배운다는 발상은 특히 아이들과 가족 단위 관람객에게 중요하다. ‘정답 탁! 청동금탁 OX퀴즈’, ‘회암사지 8개의 비밀을 찾아서’, ‘회암사를 재건하라’ 같은 프로그램 이름만 봐도 접근 방식이 딱딱하지 않다. 역사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퀴즈를 풀고 미션을 수행하며 유적을 탐험하게 만든다. 아이들에게 유적지는 종종 지루한 장소가 되기 쉽다. 그러나 놀이와 탐험의 형식으로 다가가면 전혀 다른 공간이 된다. 그 경험은 역사에 대한 첫인상을 바꾸고, 세계유산의 가치 역시 훨씬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만든다.


기버마켓과 친환경 체험 부스 같은 ESG 요소도 가볍게 볼 수 없다.  

역사축제가 과거만 이야기하는 자리에 머물지 않고, 현재의 가치와 연결될 때 축제는 더 풍성해진다. 나눔과 순환, 친환경 실천을 프로그램 안에 담아낸 것은 유산의 보존이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600년 전의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오늘의 공동체와 환경을 생각하는 것. 이런 연결이 축제를 과거 회상에 그치지 않게 만든다.


결국 이번 회암사지 왕실축제가 중요한 이유는 하나다.  

세계유산은 서류 위에서만 등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유산을 지역 사회가 얼마나 알고, 얼마나 아끼며, 얼마나 현재의 문화로 이어가고 있는지가 함께 보인다.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행렬, 아이들이 역사를 배우는 체험, 지역 예술인이 만드는 무대, 유적의 의미를 오늘의 감각으로 바꾸는 공연. 이런 것들이 모여 회암사지가 단순한 옛 절터가 아니라 살아 있는 문화유산임을 증명한다.


4월 17일, 옥정호수공원에서 축제의 출정식이 열린다.  

그 순간부터 회암사지의 시간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600년 전 왕이 머물렀던 자리의 기억이, 오늘 양주 시민의 발걸음과 만나 다시 길 위에 오른다.


세계유산은 멀리 있는 이름이 아니다.  

그 가치를 오늘 우리가 함께 걷고, 보고, 만들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  

회암사지 왕실축제는 바로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600년은 그렇게 다시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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