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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상자 하나가 도시를 바꾼다

  • 양동원 기자
  • 입력 2026.04.09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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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주시 상자텃밭 사업이 일깨우는 도시와 흙의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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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흙을 만진다는 것은 생각보다 특별한 일이다.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싹이 트기를 기다리는 시간에는 도시 생활이 자꾸 밀어내는 감각들이 담겨 있다. 결과를 서두르지 않는 기다림, 내 손으로 무언가를 길러낸다는 기쁨,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받아들이는 경험. 콘크리트와 아스팔트가 일상을 덮을수록 이런 감각은 더 희귀해진다.


양주시가 추진하는 ‘2026년 도시농업 상자텃밭 새활용 보급사업’은 바로 그 잃어버린 감각을 도시 한복판으로 다시 불러오는 시도다.


겉으로 보면 사업 구조는 단순하다.  

기존에 보급된 상자텃밭에 상토를 지속 지원해 어린이집, 초등학교, 지역공동체 등 90개소에서 도시농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방식이다. 상자텃밭 100세트와 상토 665포가 배부된다. 그러나 이 단순한 구성 안에는 적지 않은 철학이 숨어 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새활용’이라는 말이다.  

버려진 것을 다시 쓰는 차원을 넘어, 익숙한 공간을 새롭게 해석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 학교 한켠의 빈 자리, 어린이집 마당의 자투리 공간, 공동체 공간의 유휴 부지 같은 곳들이 상자텃밭 하나로 작은 녹색 거점이 된다. 새로운 땅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공간을 다르게 바라보는 일. 도시농업은 거대한 개발이 아니라 이런 시선의 전환에서 시작된다.


참여 대상의 구성도 의미가 깊다.  

어린이집과 초등학교에 놓이는 상자텃밭은 단순한 체험 교구가 아니다. 흙보다 화면을 먼저 접하는 아이들, 채소를 자연이 아니라 진열대에서 만나는 데 익숙한 아이들에게 텃밭은 살아 있는 배움의 장이 된다. 씨앗이 싹이 되고, 잎이 자라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직접 지켜보는 경험은 어떤 설명보다 선명하다. 생명의 속도는 빠르지 않다는 사실, 키운다는 것은 돌본다는 뜻이라는 사실을 아이들은 흙 앞에서 자연스럽게 배운다.


지역공동체가 함께한다는 점도 중요하다.  

텃밭은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함께 심고, 함께 돌보고, 함께 수확하는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다시 말을 섞고 관계를 맺는다. 도시가 커질수록 이웃은 가까이 살면서도 멀어지기 쉽다. 그런 도시에서 흙은 의외로 좋은 매개가 된다. 작은 상자 하나를 중심으로 안부를 묻고 계절을 이야기하며 수확을 나누는 순간, 공동체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생활의 리듬 속에서 조금씩 회복된다.


도시농업매니저 4명이 현장에 투입된다는 점도 이 사업의 완성도를 높인다.  

상자를 나눠준다고 해서 곧바로 텃밭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심어야 하는지, 언제 물을 줘야 하는지, 병충해는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처음 흙을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 수 있다. 현장 지도는 그래서 단순한 기술 지원이 아니라, 사업이 실제 경험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연결장치다. 행정이 물품을 보급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상자 안의 생명이 잘 자라도록 끝까지 살피겠다는 태도이기도 하다.


우수 기관을 시상하고, 운영이 미흡한 텃밭은 회수한다는 방침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지원이 지속되려면 책임 역시 뒤따라야 한다는 원칙이 읽힌다. 잘 가꾸는 곳에는 동기를 부여하고, 방치되는 자원은 다시 필요한 곳으로 돌리는 방식은 공공사업의 효율성과 지속 가능성을 함께 생각한 접근이라 할 만하다.


이 사업은 치유농업의 가치와도 맞닿아 있다.  

오늘날 농업은 단순히 먹거리를 생산하는 일을 넘어 몸과 마음을 돌보는 활동으로 확장되고 있다. 흙을 만지고 식물을 돌보며 성장의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사람의 긴장을 풀고 정서를 안정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도심 속 상자텃밭은 그런 치유의 경험을 특별한 시설이 아니라 일상 가까이로 끌어온다. 학교 마당에서, 어린이집 한편에서, 동네 공동체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돌봄이 결국 사람의 마음에도 작지 않은 변화를 만든다.


양주시농업기술센터가 연중 운영하는 다양한 프로그램들과 맞물려 보면, 이 사업은 단발성 보급에 그치지 않는다.  

초보농부 힐링텃밭, 세대공감 나눔텃밭, 여름방학 초록교실, 어린이 텃밭체험, 찾아가는 반려식물 상담까지 이어지는 흐름은 도시농업을 하나의 생활문화로 정착시키려는 시도로 읽힌다. 씨앗을 심는 경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돌보고 나누고 다시 배우는 순환 구조를 만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상자 하나는 작다.  

그러나 그 작은 상자들이 도시 곳곳에 놓이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안에서 자라는 것은 채소만이 아니다. 아이들의 호기심, 이웃의 대화, 도시인의 잊힌 감각, 그리고 인간과 흙 사이의 오래된 관계가 함께 자란다.


도시는 앞으로도 더 커질 것이고, 녹지는 쉽게 넓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흐름을 한 번에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상자텃밭 하나가 놓인 자리에서 도시는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숨을 쉬기 시작한다. 거창한 변화는 아니지만, 그래서 더 오래간다.


흙을 만지는 도시는 아직 살아 있다.  

그리고 그 작은 상자 안에서, 도시의 다른 가능성도 조용히 싹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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