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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동정이 아닌 권리로, 함께 걷는다는 것

  • 양상현 기자
  • 입력 2026.04.11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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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천의 봄길 위에서 다시 묻는 장애인의 시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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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늘 가장 먼저 거리의 표정을 바꾼다.  

겨우내 굳어 있던 길 위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다시 놓이고, 도시의 공기는 조금씩 부드러워진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 길은 계절처럼 쉽게 열리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보도블록 하나, 경사로 하나, 시선 하나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넘기 어려운 벽이 되기도 한다.


지난 10일 포천에서 열린 ‘제14회 420 두바퀴로 가는 세상’은 바로 그 벽 앞에서,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있는지를 다시 묻는 자리였다. 장애인과 시민들이 함께 휠체어를 밀고, 함께 걷고,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포천의 거리를 지나갔다. 그 행진은 단순한 기념행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장애인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권리의 주체”라는 너무도 당연하지만 여전히 충분히 실현되지 않은 진실을 세상 한복판에 다시 꺼내 놓는 일이었다.


사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장애를 ‘배려’의 언어로 말해왔다.  

도와줘야 하는 사람, 보살펴야 하는 사람, 이해해줘야 하는 사람.  

그 말들 안에 선의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선의만으로는 결코 사람의 권리를 보장할 수 없다. 배려는 줄 수도 있고 거둘 수도 있지만, 권리는 누구도 함부로 미룰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애인 인권을 이야기할 때 중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라 시민권이다.  

얼마나 안쓰럽게 볼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동등하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다.  

이동할 권리, 일할 권리, 배우고 관계 맺을 권리, 지역사회 안에서 자연스럽게 존재할 권리.  

이 권리들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따뜻한 말이 많아도 그 사회는 여전히 누군가를 가장자리로 밀어내고 있는 셈이다.


포천에서 14년째 이어지고 있는 ‘420 두바퀴로 가는 세상’이 특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행사는 일회성 구호를 외치는 자리가 아니라, 지역사회가 오랜 시간에 걸쳐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기 위해 쌓아온 작은 실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한 해 한 해 이어진 발걸음은 어쩌면 아주 느려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사회의 인식은 원래 그렇게 바뀐다. 거창한 선언보다, 같은 길을 함께 걸어보는 경험 속에서. 멀리 떨어져 이해하는 척하는 것보다, 바로 옆에서 속도를 맞추는 순간 속에서.


함께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상대의 속도를 받아들이는 일이고, 내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앞서 가는 사람이 아니라 옆에 서는 사람이 되겠다는 선택이다.  

그래서 이날의 행진은 단지 장애인의 권리를 말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우리가 서로를 어떤 시민으로 대할 것인가, 어떤 공동체를 만들 것인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물론 행진만으로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행사가 끝난 뒤에도 장애인은 여전히 턱 앞에서 멈추고, 정보에서 소외되고, 제도 밖으로 밀려나기 쉽다.  

이동권과 자립생활 지원, 무장애 환경 조성, 복지 사각지대 해소 같은 과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권리를 외치는 목소리가 진짜 힘을 가지려면, 그것이 행정과 제도, 예산과 공간, 일상의 질서 속에서 실제로 구현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먼저 마음으로 길을 내고 나서야 제도로 길을 넓힌다.  

그런 점에서 포천의 이 행진은 충분히 의미가 깊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할 때가 많지만, 사실 권리를 보장하는 일은 ‘베푸는 것’이 아니라 ‘되돌려주는 것’에 가깝다. 원래 있어야 할 자리를, 원래 누려야 할 몫을, 너무 오래 미뤄왔던 당연함을 다시 제자리에 놓는 일이다.


포천의 봄길 위에서 사람들이 함께 걸었던 그 장면은 조용하지만 분명한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장애인을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보다, 얼마나 함께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느냐.  

그 질문 앞에서 지역사회는 더 이상 관람객이어서는 안 된다.  

함께 걷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동정은 사람을 잠시 위로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권리는 사람을 살아가게 한다.


그리고 지역사회의 품격은,  

가장 약한 이들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느냐가 아니라  

그들을 얼마나 동등한 시민으로 존중하느냐에서 결정된다.


포천에서 14년째 이어진 ‘두바퀴로 가는 세상’은 바로 그 사실을,  

올해도 말없이 그러나 또렷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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