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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 11.5km, 마지막 문을 열어준 사람들… 개성인삼농협의 따뜻한 동행

  • 양상현 기자
  • 입력 2026.04.11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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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천 ‘420 두바퀴로 가는 세상’ 대장정 끝자락, 인삼차 한 잔이 건넨 위로와 연대의 의미

개성인삼조합.jpg

 

개성인삼 민순기 조합장.jpg


지난 4월 10일 오후, 포천의 하늘은 끝내 비를 내렸다.  

봄비라고 하기엔 제법 차가웠고, 국도 위를 스쳐 가는 바람은 젖은 옷깃 사이로 파고들었다. 경기 포천시 소흘읍행정복지센터를 출발해 포천시청까지 이어지는 11.5킬로미터의 길. 누군가에게는 긴 산책일 수 없는 거리였고, 누군가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멀고 무거운 길이었다.


휠체어 바퀴는 빗물이 고인 도로를 지나야 했고, 두 발로 걷는 사람들도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우비는 이미 젖을 만큼 젖어 있었고, 손은 차가워졌다. 몇 시간을 걸어온 끝에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몸은 더 무거워졌다. 늘 그렇듯, 마지막 구간이 가장 길었다.


그때, 개성인삼농협의 문이 열렸다.


◇ 마지막 고비 앞에서 만난 따뜻한 쉼표


이날 ‘420 두바퀴로 가는 세상’ 행진은 단순한 걷기 행사가 아니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은 길을, 같은 속도로 함께 걸으며 이동권의 의미를 몸으로 나누는 자리였다. 누구는 휠체어를 밀었고, 누구는 곁에서 보폭을 맞췄다. 그렇게 함께 걸은 시간만도 이미 몇 시간째였다.


포천시청 광장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참가자들의 체력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비를 맞으며 오래 움직인 몸은 금세 식었고, 지친 얼굴에는 말수도 줄어들었다.


바로 그 마지막 고비 앞에서 개성인삼농협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었다.  

민순기 조합장은 행진의 취지를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한다. 장애인 이동권을 알리는 이 대장정이 조합 앞을 지난다는 사실을 알고, 그 길 위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할지를 먼저 떠올렸다.


그 생각은 아주 현실적인 데서부터 시작됐다.  

바로 화장실이었다.


◇ 이동권은 길 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였다


장거리 이동에서 휠체어 이용자들이 가장 절실하게 마주하는 벽 가운데 하나는 화장실이다.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고, 마음 편히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은 더 드물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동 중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한다. 이동권은 단지 버스를 타고 내리는 문제만이 아니라, 어디서 쉬고, 어디서 머물고, 어떤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민 조합장은 휠체어 접근이 가능한 시설을 전면 개방하도록 했다. 직원들은 참가자들이 비를 피할 수 있도록 공간을 정리하고, 편히 드나들 수 있게 동선을 살폈다. 바닥이 미끄럽지 않은지,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어와도 불편하지 않을지 세심하게 챙겼다.


그것은 단순히 “잠깐 쓰고 가세요”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지친 사람들을 향해 “어서 들어오세요”라고 먼저 말해주는 태도에 가까웠다.  

장소를 내준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맞이한 것이었다.


◇ 인삼차 한 잔이 전한 온기


개성인삼농협 직원들이 준비한 것은 따뜻한 인삼차였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컵이 참가자들의 손에 하나둘 쥐어졌다. 차갑게 식은 몸에 가장 먼저 닿은 것은 그 컵의 온기였다. 두 손으로 컵을 감싸 쥐자 손끝이 조금씩 풀어졌고, 한 모금 들이키자 목을 타고 내려가는 따뜻함이 몸 안쪽까지 번졌다.


그날의 인삼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었다.  

비를 오래 맞은 사람에게는 체온이었고, 지친 사람에게는 “조금만 더 가자”는 응원이었고, 마지막 힘을 끌어올려야 하는 이들에게는 작지만 분명한 용기였다.


바나나와 떡도 함께 준비돼 있었다. 몇 시간째 이어진 행진 끝에 먹는 간식은 그저 허기를 달래는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 구간을 버티게 하는 연료였고, 몸이 아닌 마음부터 먼저 달래주는 위로였다.


한 참가자는 차를 받아든 뒤 이렇게 말했다.  

“비바람 때문에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는데, 민순기 조합장님과 직원분들이 직접 챙겨주신 따뜻한 인삼차와 떡 덕분에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를 외면하지 않고 따뜻하게 맞아준 개성인삼농협 식구들의 진심 어린 마음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 말은 짧았지만, 그날의 풍경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몸을 쉬게 한 것도 맞지만, 사실 더 크게 쉬어간 것은 마음이었다.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누군가 이 길의 의미를 함께 알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 가장 조용했지만 가장 큰 연대


개성인삼농협은 장애인단체가 아니다.  

장애인 권익운동을 전면에서 해온 기관도 아니다. 지역의 농업 협동조합이고, 그날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포천의 한 생활 현장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곳이 문을 열었다.  

이 장면이 깊은 울림을 남긴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장애인 이동권은 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고, 복지기관만의 과제도 아니다. 지역사회가 함께 응답해야 할 삶의 문제이며, 그 응답은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문을 열어주는 일, 잠시 비를 피하게 해주는 일,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는 일. 그렇게 소박한 행동 하나가 사람을 다시 걷게 할 수 있다.


농협 측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우러지는 포천을 만드는 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당연한 일.’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는다.  

특별히 칭찬받아야 할 선행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지역사회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는 태도. 바로 그런 태도에서 도시의 품격은 드러난다. 누군가의 불편을 특별한 문제로 밀어두지 않고, 우리의 일로 받아들이는 마음. 그 마음이 쌓일 때 포용은 표어가 아니라 풍경이 된다.


◇ 다시 길 위로, 그리고 끝내 도착한 사람들


짧지만 깊었던 휴식을 마친 참가자들은 다시 우비를 여몄다.  

휠체어 바퀴는 다시 국도 위로 나섰고, 발걸음도 다시 같은 속도를 찾았다. 차향이 남아 있는 숨을 고르며, 사람들은 마지막 남은 거리를 향해 나아갔다.


7시간의 대장정 끝에 포천시청 광장에 도착했을 때, 얼굴마다 빗물과 땀, 피로가 함께 묻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선명한 것이 있었다. 끝까지 왔다는 안도감, 그리고 끝까지 함께 왔다는 감정이었다.


그 길에는 속도를 맞춰준 사람이 있었고, 뒤에서 밀어준 사람이 있었고, 중간에서 문을 열어준 사람들이 있었다. 개성인삼농협의 인삼차 한 잔은 그 긴 여정 속 작은 장면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작은 장면이 이 행진의 본질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이 길은 누군가 혼자 가는 길이 아니었다.  

장애인만의 길도 아니었다.  

포천이 함께 걷는 길이었다.


그래서 이날 빗속 43번 국도 위에서 가장 또렷하게 남은 문장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함께 가니 길지 않다.”


실제로 길은 짧지 않았다.  

비도 쉬이 그치지 않았고, 몸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끝내 도착했다.  

함께였기 때문이다.


2026년 4월 10일,  

포천 소흘읍에서 포천시청 광장까지 이어진 그 빗속의 길 위에서,  

개성인삼농협이 열어준 문은 단지 건물의 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역사회의 마음이 열리는 순간이었고,  

누군가를 끝까지 걷게 만드는 연대의 문이었다.


빗속 국도 위에서 이날 증명된 것은 하나였다.  

함께 가면, 멀고 힘든 길도 끝내 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날 포천은, 정말 함께 걷고 있었다.


동행취재 메트로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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