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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늦기 전에, 한 번 더 이름을 불러야 한다

  • 양상현 기자
  • 입력 2026.04.20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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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라져가는 참전용사들 곁에 지금 필요한 것은 따뜻한 시선과 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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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지만, 어떤 세대의 노년은 조금 더 묵직하다.  

한 시대의 고통을 온몸으로 통과해온 사람들의 노년에는 개인의 세월만이 아니라, 역사 전체의 무게가 함께 얹혀 있기 때문이다. 6·25 참전용사들이 바로 그런 분들이다.


열다섯 살의 소년이 형을 따라 나선 길 끝에서 전쟁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오래 마음을 붙든다. 아직 충분히 자라지 못한 몸으로 신체검사를 통과하려 형 뒤에 서야 했던 아이, 제 몸집만 한 총을 들고 전장을 누볐던 소년, 배고픔을 견디기 위해 생솔잎을 씹고, 포성이 멎지 않아 오랜 시간 신발조차 편히 벗지 못했던 젊은 날. 그 시간은 한 사람의 청춘이면서 동시에 이 나라의 오늘을 지탱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그 희생 위에서 평화를 일상처럼 누리고 있다.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때로는 그것이 누군가의 상처와 맞바꾼 것임을 잊고 살아간다. 자유롭게 거리를 걷고, 가족과 식사를 하고, 내일을 계획할 수 있는 평범한 하루가 사실은 결코 평범하게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자주 잊는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나라를 지켜낸 분들이 이제는 외로움과 고립 속에서 하루를 보낸다는 점이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또 한 명의 전우를 떠나보내는 소식일까 두려워진다는 말은, 어떤 통계보다 더 깊게 현실을 전한다. 전쟁의 참혹함을 견딘 분들이 노년에는 적막과 상실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 묵직한 질문을 남긴다.


잊혀진다는 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자리가 점점 옅어지는 경험이다.  

누군가에게는 생일조차 조용히 지나가는 하루가 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하루의 가장 큰 무게가 되기도 한다. 사람은 물질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특히 긴 생을 살아낸 노년일수록, 자신을 기억해주는 눈빛과 말을 더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


그래서 참전용사들을 찾아가 생일을 축하하고, 케이크를 건네고, 대화를 나누는 일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당신은 아직 우리 곁의 소중한 분”이라는 확인이다. 무엇을 얼마나 드리느냐보다, 누군가를 잊지 않고 찾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위로가 된다. 한 번의 방문, 한 번의 축하, 한 번의 대화가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일 앞에서 우리는 종종 묻게 된다.  

지금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예우는 무엇인가.  

그 답은 거창한 말보다 더 가까운 곳에 있을지 모른다.  

기억하는 일, 찾아가는 일, 이야기를 듣는 일, 늦기 전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일. 존경은 큰 구호 속에서만 완성되지 않는다. 때로는 아주 조용한 방문과 다정한 인사 속에서 더 분명해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참전용사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르게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한 분이 떠날 때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삶뿐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 한 장면도 함께 잃는다.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은 목소리, 그 시대를 견딘 몸의 기억, 말로 다 옮길 수 없는 청춘의 상처가 하나씩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미루지 말아야 할 시간이다.  

언젠가 감사하겠다는 마음은 너무 자주 늦는다.  

언젠가 찾아뵙겠다는 다짐도, 시간을 이기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영웅들을 기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살아 계신 영웅들의 오늘을 조금 덜 외롭고 덜 쓸쓸하게 만드는 것이다.


생일을 기억해드리는 일은 사소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분에게는 그 하루가 “나는 아직 잊히지 않았다”는 가장 선명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대화 한 번, 손 한 번, 이름을 불러드리는 한마디가 그분들의 긴 생애 끝에서 작지 않은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충분히 값진 일이다.


참전용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라 존중이다.  

불쌍히 여기는 시선이 아니라, 늦지 않게 건네는 감사와 예의다.  

그분들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곁에서 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현재의 영웅들이다. 그리고 영웅은 박수 속에서만 기억되어서는 안 된다. 가장 조용한 날에도, 가장 적막한 방 안에서도, 존엄하게 기억되어야 한다.


우리는 너무 늦기 전에 한 번 더 이름을 불러야 한다.  

한 번 더 찾아가야 하고, 한 번 더 손을 잡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누리는 평화의 빚을 갚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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