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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나무를 심는 사람들은 오늘보다 먼 시간을 산다

  • 양상현 기자
  • 입력 2026.04.20 15: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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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보산에 심은 연산홍과 왕벚꽃, 그 조용한 손길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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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라는 말을 듣는 일이 이제는 너무 흔해졌다.  

흔해진 말은 때로 무뎌진다.  

폭염과 가뭄, 산불과 폭우가 계절의 얼굴을 바꾸고 있는데도, 우리는 자주 그것을 뉴스의 한 장면처럼 지나치곤 한다.  

세상이 조금씩 뜨거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앞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 싶어 마음이 먼저 지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누군가가 흙을 파고, 나무를 심고, 가지를 다듬고, 숲을 돌본다는 소식은 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남는다.  

그것은 거대한 구호보다 조용하고, 화려한 선언보다 소박하지만, 이상하게도 더 깊이 믿게 되는 장면이다.  

말은 공중으로 흩어지지만, 손으로 한 일은 땅에 남기 때문이다.


지난 4월 13일, 포천시민햇빛조합이 천보산 자연휴양림에서 ‘나무 가꾸기’ 행사를 열었다는 소식도 그랬다.  

조합원들과 시민들은 숲으로 올라가 기존에 심어놓은 나무를 정비하고, 연산홍과 왕벚꽃을 더 심으며 천보산의 시간을 조금 더 푸르게, 조금 더 다정하게 가꾸었다.  

삽과 호미, 장갑과 전지가위를 챙겨 모인 사람들.  

누군가는 도구를 들었고, 누군가는 흙을 북돋웠으며, 누군가는 함께 온 이들의 마음을 북돋웠을 것이다.  

이런 풍경을 떠올리면, 기후위기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무를 심는 일은 단순히 식물을 옮겨 심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심는 일이다.  

오늘의 손길을 몇 해 뒤의 꽃으로 바꾸는 일이고, 지금의 수고를 언젠가 누군가가 누릴 그늘로 바꾸는 일이다.  

연산홍은 제철이 오면 붉게 피어날 것이고, 왕벚꽃은 해마다 봄빛을 열어줄 것이다.  

그러나 그 꽃은 어느 날 갑자기 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름 없이 흙을 만진 사람들, 땀을 흘린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일을 기꺼이 맡은 사람들의 시간이 쌓여서 비로소 한 계절의 아름다움이 된다.


우리는 자주 결과를 먼저 본다.  

만개한 꽃은 보지만, 꽃이 피기 전의 수고는 잘 보지 못한다.  

시원한 숲길은 좋아하지만, 그 숲이 자라기까지 누군가 반복해온 가꾸기의 시간은 쉽게 잊는다.  

어쩌면 기후위기 시대의 실천도 그렇다.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나무 몇 그루 심는다고 달라지겠느냐고.  

이 작은 행동이 얼마나 큰 변화를 만들 수 있겠느냐고.


그 질문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크고, 현실은 무겁다.  

탄소중립은 개인의 선의만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제도와 정책, 기술과 산업의 전환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 모든 큰 변화 역시 결국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아무도 몸을 움직이지 않는 사회에서 정책은 오래 버티기 어렵고, 아무도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 구호는 쉽게 공허해진다.  

그래서 작은 실천은 결코 작은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한 지역의 감각을 바꾸고, 한 공동체의 온도를 바꾸며,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남긴다.


포천시민햇빛조합이 2023년부터 천보산 산림 보호를 위해 이런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은 그래서 더 의미 있다.  

한 번의 행사는 이벤트가 될 수 있지만, 반복되는 실천은 문화가 된다.  

그리고 문화가 된 실천은 공동체를 조금씩 바꾼다.  

처음에는 몇 사람의 참여로 시작한 일이 해마다 이어지면서 더 많은 이들의 관심이 되고, 어느 순간 지역의 자부심이 된다.  

누군가는 그 숲을 지나며 꽃을 보고, 누군가는 아이의 손을 잡고 벚꽃 아래를 걷고, 누군가는 그 나무들이 누가 심었는지도 모른 채 시원한 숨을 들이쉴 것이다.  

그렇지만 괜찮다.  

원래 좋은 일의 상당수는, 누가 했는지 크게 드러나지 않아도 조용히 제 몫을 다한다.


나는 이런 활동의 가장 큰 가치가 ‘효과’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은 생태 보전과 경관 개선, 탄소흡수와 환경 교육의 측면에서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층위에서, 이런 실천은 우리 마음 안의 체념을 조금씩 밀어낸다.  

기후위기 시대에 사람을 가장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뜨거워진 기온만이 아니라, “이제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일지 모른다.  

그 체념이 퍼질수록 사회는 더 빨리 식고, 사람들은 더 쉽게 손을 놓는다.


그러나 천보산으로 향한 사람들은 말없이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늦었다고 멈추지 않겠다는 대답.  

작다고 포기하지 않겠다는 대답.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오늘 해보겠다는 대답.  

이런 태도야말로 기후위기 시대에 가장 귀한 희망일 것이다.


희망은 거창한 낙관이 아니다.  

희망은 오히려 삽을 드는 손에 가깝다.  

장갑을 끼고 흙을 만지는 손, 땀을 닦고 다시 몸을 굽히는 허리, 함께 차를 나눠 타고 산으로 향하는 발걸음, 이름 모를 꽃나무 하나에도 마음을 보태는 정성.  

그것이야말로 희망의 실제 모양이다.  

희망은 생각보다 늘 작고 구체적이며, 그래서 오히려 오래간다.


포천시민햇빛조합이 멈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이 심는 것은 단지 연산홍과 왕벚꽃만이 아니다.  

그들은 이 지역에 살아 있는 책임감을 심고, 시민이 스스로 미래를 돌볼 수 있다는 믿음을 심고, 다음 세대에게 건네줄 생태적 예의를 심고 있다.  

오늘 천보산에 묻힌 뿌리는 앞으로 여러 계절을 지나며 꽃을 피울 것이고, 그 꽃은 다시 많은 사람의 마음에 작은 질문 하나를 남길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미래를 심고 있는가.”


결국 나무를 가꾸는 사람들은 오늘만 사는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 생애의 편의보다 더 먼 시간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당장 눈앞의 결과보다, 언젠가 누군가가 누릴 봄날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조금 숙연해진다.  

세상이 빠르고 각박할수록, 시간을 천천히 심는 사람들은 더욱 귀해 보이기 때문이다.


기후위기는 분명 거대한 현실이다.  

그러나 거대한 현실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품위 있는 응답은, 결국 손과 발로 가능한 일을 멈추지 않는 것 아닐까.  

한 번 더 나무를 돌보고, 한 번 더 흙을 일구고, 한 번 더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함께 땀 흘리는 일.  

그렇게 모인 시간들이 숲이 되고, 그 숲이 다시 우리에게 내일을 건네줄 것이다.


언젠가 천보산에 심긴 왕벚꽃이 만개하는 날,  

연산홍이 환하게 번져가는 길을 따라 사람들이 걷게 되는 날,  

누군가는 그저 아름답다고만 느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그 아름다움은 저절로 온 것이 아니라, 한때 어떤 사람들이 기후위기 앞에서 체념 대신 삽을 들었기 때문에 가능해졌다는 사실을.


그래서 포천시민햇빛조합의 나무 가꾸기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아직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조용한 증거다.  

그리고 그 증거는 말보다 오래 남을 것이다.  

꽃으로 피고, 그늘로 자라고, 맑은 공기로 돌아와  

우리에게 다시 묻을 것이다.


당신은 오늘, 어떤 내일을 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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