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박마을이 없앤 것은 시설이 아니라 공동체의 품격이다
최근 포천 호박마을에서 벤치가 사라졌다. 조형물이 사라졌고, 평생학습 프로그램도 자취를 감췄다. 겉으로만 보면 시설 몇 개가 정리된 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일을 그렇게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는, 사라진 것들의 성격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벤치와 조형물, 그리고 프로그램. 이 목록을 가만히 놓고 보면 공통점이 드러난다. 모두 김윤순 전 이장이 만들거나 유치한 것들이다. 이쯤 되면 단순한 정비나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누군가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의도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정확하게 특정인의 성과만 사라질 수는 없다.
이것은 행정이라기보다 배제에 가깝다. 정비라기보다 흔적 지우기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벤치는 특정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었다. 주민들이 쉬어가던 마을의 쉼터였다. 조형물 역시 개인의 장식물이 아니라 마을의 표정이었다. 평생학습 프로그램도 누군가의 이름값을 위한 사업이 아니라 주민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공동의 자산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없애는 방식이 특정 인물의 흔적을 지우는 과정과 겹쳐 보인다면, 피해는 결코 한 사람에게만 돌아가지 않는다. 결국 주민 전체가 피해자가 된다.
쉬어가던 어르신이 피해자이고, 배우던 주민이 피해자이며, 마을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던 공동체 전체가 피해자다.
김윤순 전 이장이 “내가 없어져야 이런 일들이 멈추려나. 내가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한 건가”라고 자책했다는 말은 그래서 더 무겁다. 마을을 위해 뛰었던 사람이 스스로를 탓하게 되는 상황, 주민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이 결국 “괜히 나섰나”라고 되묻게 되는 상황. 이것은 한 개인의 상처가 아니라 공동체의 실패다.
정상적인 공동체라면 다를 수는 있어도 흔적까지 지우지는 않는다. 의견 충돌은 있을 수 있어도, 주민을 위한 성과까지 함께 없애버리지는 않는다. 누군가의 공을 인정하기 싫다고 해서 마을의 자산까지 철거하는 일은 상식적인 공동체 운영과는 거리가 멀다. 만약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앞으로 누가 마을을 위해 나서겠는가. 누가 주민을 위해 새로운 사업을 유치하려 하겠는가. 결국 남는 것은 침묵과 눈치뿐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낡은 권력의 문법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갈등도 없다, 새로운 것을 만들지 않으면 부딪칠 일도 없다, 기존 질서에 순응하면 문제도 없다는 식의 사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평온은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질서가 아니라, 공동체를 정지시키는 습성일 뿐이다.
마을은 원래 누군가의 수고로 조금씩 나아진다. 누군가 벤치를 놓고, 누군가 프로그램을 끌어오고, 누군가 주민들이 함께 누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 때 공동체는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그 과정에서 갈등이 생길 수는 있다. 그러나 갈등을 조정해야 할 자리에 배제와 보복의 정서가 들어서는 순간, 마을은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니라 폐쇄적인 권력의 공간으로 변질된다.
더 분명히 말하자. 마을 자산을 특정 인물의 흔적이라는 이유로 없애는 것은 공공의 이름을 빌린 사적 보복처럼 비칠 수밖에 없다. 행정은 감정의 연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공공은 세력 다툼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주민 모두가 이용하던 공공 자산은 누가 만들었는지가 아니라, 주민들에게 얼마나 필요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물론 벤치는 치울 수 있다. 조형물은 철거할 수 있다. 프로그램은 폐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위에서 주민들이 나눈 시간과 기억까지 지울 수는 없다. 벤치에서 나눴던 안부, 프로그램에서 느꼈던 배움의 기쁨, 마을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까지는 없앨 수 없다. 오히려 무리한 지우기는 반대로 더 많은 것을 드러낸다. 누가 마을을 위해 일했는지, 누가 그 흔적을 견디지 못했는지, 누가 공공보다 감정을 앞세웠는지가 더 선명해진다.
호박마을은 지금 벤치 몇 개를 치운 것이 아니다. 공동체의 품격을 시험대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사람의 흔적을 지우는 방식으로 간다면, 다음에 사라질 것은 벤치나 조형물이 아니라 마을을 위해 일하려는 사람들일 것이다. 아무도 나서지 않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아무도 변화를 말하지 않는 공동체. 그곳은 평온한 마을이 아니라 침묵에 길들여진 마을일 뿐이다.
호박마을이 정말 지켜야 할 것은 벤치의 존치 여부가 아니다. 더 본질적인 것은 누군가의 헌신을 존중하는 태도, 주민의 자산을 사적인 감정으로 훼손하지 않는 절제, 그리고 마을을 마을답게 유지하는 공동체의 품격이다.
벤치를 치운다고 역사가 지워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무엇을 지우려 했는지가 더 또렷이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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