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숙한 수사 말고 성적표부터 내놓아야 한다
백영현 포천시장이 24일 예비후보 등록과 함께 다시 한 번 시민 앞에 섰다. 메시지는 단순했다. 자신은 정치적 신분 상승을 노리는 “정치꾼”이 아니라 시민의 삶을 챙기는 “지역 일꾼”이며, 지난 4년 동안 시민 불편 해소와 현장 행정에 집중해 왔다는 것이다. 지방선거에서 이런 말은 늘 먹힌다. 생활정치, 현장소통, 주민불편 해소.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단어들이다. 문제는 그 말들이 너무 자주, 너무 쉽게, 너무 무책임하게 소비돼 왔다는 점이다.
이번 출마 선언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백 시장은 자신이 매년 14개 읍면동을 돌며 공감소통 간담회를 열었고, 약 1100건의 민원을 접수했다고 강조했다. 언뜻 보면 부지런한 시장의 기록처럼 들린다. 그러나 시민이 선거에서 궁금한 것은 ‘얼마나 많이 들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제대로 해결했느냐’다. 민원 접수 숫자는 노력의 증거일 수는 있어도 성과의 증거는 아니다. 행정은 접수함이 아니다. 해결 시스템이다. 1100건을 들었다면, 이제는 그중 몇 건을 해결했고 몇 건은 왜 못 했는지를 먼저 말해야 한다. 그것이 성과이고, 그것이 책임이다.
백 시장은 행정 불신이 만연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주민들이 행정을 신뢰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뢰는 자기 선언으로 생기지 않는다. “신뢰가 회복됐다”고 말하는 순간, 시민은 되묻게 된다. 그래서 무엇이 달라졌느냐고. 민원 처리율은 얼마나 올랐는가. 반복 민원은 얼마나 줄었는가. 교통, 교육, 일자리, 생활 인프라에서 시민 체감도는 어떻게 변했는가. 이런 질문 앞에서 수치와 결과가 빠진 “신뢰 회복”은 감상에 불과하다. 선거에서 감상은 기사 제목이 될 수는 있어도 표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더 문제적인 것은 백 시장이 꺼내든 “정치꾼 대 일꾼” 구도다. 이 문장은 간명하고 자극적이며 선거용으로는 매우 편리하다. 하지만 편리한 프레임일수록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개 자기 검증을 건너뛰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패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정치꾼으로 몰아세우고 자신을 일꾼으로 포장하는 순간, 유권자가 물어야 할 핵심은 하나다. 그렇다면 지난 4년 동안 현직 시장으로서 당신은 정확히 어떤 일로 평가받아야 하는가. 선거는 이미지 대결이 아니라 성적표 제출의 시간이다. 현직이 다시 나서면서도 여전히 “나는 일꾼입니다”라는 자기소개 수준에 머문다면, 그것은 성과보다 캐릭터에 기대겠다는 뜻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사실 백 시장의 언어는 생활정치를 말하면서도 매우 정치적이다. “정치적 신분 상승을 위한 정치꾼”이라는 표현은 자신을 낮추는 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대를 깎아내리는 이분법적 공세다. 하지만 지방선거는 상대를 비하한다고 해서 자신의 능력이 입증되는 선거가 아니다. 오히려 현직이 이 프레임에 기대는 순간, 유권자는 묻게 된다. 4년 동안 시정을 책임진 사람이 왜 아직도 자신의 실적보다 상대의 이미지를 먼저 끌어와야 하는가. 진짜 자신 있는 후보라면 “저 사람은 정치꾼”이라고 말하기보다 “나는 이 문제를 이렇게 해결했다”고 말해야 한다.
백 시장은 또 “지금 경제가 코로나 이전보다도, IMF 이전보다도 더 힘들다”고 말했다. 위기감을 극대화하려는 의도는 이해된다. 하지만 이렇게 강한 표현일수록 더 엄정한 설명이 따라야 한다. 포천 경제가 얼마나 어렵고, 어느 분야가 무너지고 있으며, 지난 4년 시정은 여기에 어떤 처방을 내놨는가. 만약 그 설명이 비어 있다면, 이런 발언은 정밀한 진단이 아니라 막연한 불안 조성으로 비칠 수 있다. 더구나 현직 시장이 지역경제 위기를 말할 때는 남 얘기하듯 해서는 안 된다. 지금 어렵다면, 그 어려움의 일부는 결국 현 시정의 책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기를 말하려면 변명보다 책임이 먼저 나와야 한다.
그는 “포천에 기회가 찾아왔다”고도 했다. 그러나 선거철만 되면 모든 후보의 입에서 “기회”라는 말이 쏟아진다. 문제는 그 기회가 언제나 구체성을 결여한 채 떠돈다는 데 있다. 무엇이 기회인가. 어느 산업이고, 어떤 사업이며, 누가 혜택을 받고, 어떤 재정적 토대 위에 추진되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기회”는 희망이 아니라 구호다. 시민은 이미 수없이 많은 개발 청사진과 비전 문구에 익숙하다. 이제는 방향보다 실행력을, 슬로건보다 완성도를 묻는다.
백 시장은 자신의 강점으로 29년 지방행정 실무 경험을 내세웠다. 물론 경험은 자산이다. 그러나 오래 했다는 사실 자체가 곧 유능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익숙함은 강점인 동시에 관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특히 재선을 노리는 현직에게 경험은 더 이상 소개 문구가 아니라 검증 대상이다. 경험이 많다면 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는가. 경험이 많다면 왜 더 과감한 변화가 보이지 않았는가. 경험은 선거 포스터에 적을 문장이 아니라, 이미 행정 결과로 증명돼 있어야 할 항목이다.
출마 선언 전체를 관통하는 백 시장의 정서는 “나는 시민 곁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권자는 이제 그 말에 쉽게 감동하지 않는다. 모든 정치인이 선거철이면 시민 곁에 선다. 문제는 선거가 끝난 뒤에도 거기에 남아 있었느냐는 것이다. 뚜벅뚜벅 걸으며 40여 일 동안 시민을 만나겠다는 말도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선거 때 걷는 것은 누구나 한다. 진짜 중요한 것은 지난 4년 동안 시장실 문턱을 얼마나 낮췄는지, 주민이 체감하는 행정의 응답 속도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공약 이행률이 얼마나 되는지다. 걷는 장면은 사진이 되지만, 결과는 삶이 된다. 시민은 사진이 아니라 삶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번 출마 선언은 현직 프리미엄의 언어가 아니라 현직 피로감의 언어로 읽힐 위험도 있다. 왜냐하면 메시지의 상당 부분이 이미 익숙하기 때문이다. 시민 불편 해소, 현장 소통, 생활정치, 지역 일꾼. 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같은 말을 다시 반복할수록 시민은 반문한다. 그래서 지난 4년 동안 포천이 얼마나 달라졌느냐고. 대답이 추상적일수록, 메시지는 진정성이 아니라 매너리즘으로 변한다.
재선 도전은 초선 출마와 다르다. 초선은 약속으로 평가받을 수 있지만, 재선은 결과로 심판받아야 한다. “앞으로 하겠다”는 말보다 “이미 했다”는 증거가 훨씬 중요하다. 그럼에도 백 시장의 출마 선언은 아직도 미래형 문장이 많고 완료형 문장이 적다. 현직이면서도 신인처럼 말하고, 성과를 말해야 할 자리에서 자세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취약함의 신호일 수 있다.
유권자는 더 이상 “정치꾼이냐 일꾼이냐” 같은 쉬운 구분에 만족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물을 것이다. 정말 일꾼이라면 왜 아직도 시민이 불편한가. 정말 성과가 있다면 왜 수치로 말하지 않는가. 정말 기회가 왔다면 왜 계획은 여전히 추상적인가. 정말 신뢰를 회복했다면 왜 검증을 피해 이미지부터 앞세우는가.
백영현 시장이 이번 선거에서 시민에게 요구해야 할 것은 감정적 공감이 아니라 냉정한 재평가다. 그리고 그 재평가는 따뜻한 표현이나 겸손한 태도로 통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직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 좋은 말이 아니라 정확한 숫자, 분명한 책임, 실패에 대한 인정, 그리고 앞으로 4년을 다시 맡겨야 할 단 하나의 결정적 이유다.
출마 선언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재선의 자격은 선언으로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성과로 증명되고, 책임으로 완성되며, 검증 앞에서만 살아남는다. 백영현 시장이 정말 “정치꾼이 아닌 일꾼”을 자처하고 싶다면, 이제는 감성의 언어를 거두고 성적표부터 내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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