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학농민혁명 세계기록유산 속 최병현 선생의 이름을 마주하며

어떤 이름은 한 집안의 기억으로 남고, 어떤 이름은 시대의 기록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드물게도 어떤 이름은 집안의 기억이자 시대의 기록으로 함께 살아남는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오늘, 조부 최병현 선생의 이름을 그 거대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다시 마주하게 된 일은 내게 바로 그런 경험으로 다가온다.
오는 2026년 5월, 이촌역 2번 출구 나들이길에서 열리는 전시는 많은 이들에게는 역사 전시의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후손의 입장에서 그것은 단순한 관람이 아니다. 기록 속에 남겨진 이름 하나가 곧 가문의 시간이며, 한 시대의 뜻이며, 한국 근현대사의 깊은 층위와 연결돼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오랫동안 왜곡되거나 축소돼 이해된 측면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이를 단순한 민란으로 보았고, 또 어떤 이들은 일시적인 저항으로만 기억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 사건을 훨씬 더 넓고 깊은 관점에서 바라본다. 동학농민혁명은 단지 봉기의 역사가 아니라, 인내천(人乃天)의 사상을 바탕으로 사람의 존엄과 평등, 그리고 나라의 자주를 지키려 했던 민중적 실천의 역사였다.
그런 점에서 조부 최병현 선생의 저술인 『순교약력』과 『종리원사부동학사』가 지니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이 기록들은 단순히 사건의 주변을 메우는 참고 자료가 아니다.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이 어떻게 기억되고, 어떻게 정리되며, 어떻게 후세로 전해졌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특히 혁명 이후의 시점에서 희생과 신념, 그리고 동학의 역사적 정당성을 기록으로 붙들어 두었다는 점에서, 이 문헌들은 망각에 맞서는 증언이라 할 만하다.
역사는 승자만의 기록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공동체의 진실은 공적인 기록만이 아니라, 당시를 살았던 이들의 문제의식과 후대의 정리 속에서 더욱 온전히 드러난다.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여러 기록 가운데 최병현 선생의 저술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국가 권력이나 외부자의 시선이 아닌, 동학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내부의 언어로 사건과 인물을 정리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록이 있었기에 동학농민혁명은 단지 패배한 사건이 아니라, 계승돼야 할 정신의 역사로 남을 수 있었다.
특히 『순교약력』이라는 제목이 주는 울림은 각별하다.
역사는 종종 이름 있는 지도자 몇 사람만을 기억하지만, 실제 역사를 떠받친 것은 이름 없이 쓰러진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었다. 순교라는 말은 단지 종교적 의미를 넘어, 신념과 정의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이들을 기억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기록은 단순한 인물 정리가 아니라, 잊힐 수 있었던 희생을 역사 안에 남겨두는 작업이었다. 기록이란 결국 기억의 다른 이름이며, 기억은 공동체의 양심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다.
대한민국이 오늘 다수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한 나라로 평가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직지, 승정원일기 같은 고전적 기록유산뿐 아니라,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 4·19 혁명 기록물,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처럼 민중의 고난과 저항, 민주주의와 평등의 가치를 담은 기록들이 함께 세계적 인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뜻깊다. 이는 기록문화의 수준을 넘어, 우리가 어떤 역사를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이기도 하다.
세계기록유산은 단지 오래된 문서를 보존하는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가 함께 지켜야 할 기억을 선정하는 일이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것은, 이 사건이 더 이상 지역적 사건이나 제한된 역사로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평등과 자주, 민중의 존엄을 향한 투쟁의 기록이 세계적 보편성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이는 한국사 안에서도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조부의 이름을 다시 본다는 것은 후손에게 남다른 감회를 안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개인적 자부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한 사람의 기록이 어떻게 시대를 증언하고, 한 가문의 기억이 어떻게 공공의 역사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역사 앞에서 후손의 역할은 자랑만이 아니라, 그 기록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고 다음 세대에 정직하게 전하는 데 있을 것이다.
이촌역 전시를 찾는 많은 이들은 아마도 동학농민혁명을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처음 그 이름을 제대로 읽게 될 것이고, 누군가는 교과서에서 스쳐 지나갔던 사건의 깊이를 새롭게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기록 속 이름들을 통해, 한 시대를 버텨낸 사람들의 사상과 고통, 희생과 염원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만남이야말로 전시가 가진 가장 큰 힘이다.
기록은 종이 위에만 남지 않는다.
기록은 후손의 기억 속에 남고, 공동체의 역사 의식 속에 남으며, 때로는 한 사회가 스스로를 성찰하는 거울이 된다. 최병현 선생의 이름과 저술이 오늘 다시 읽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것은 한 가문의 영광 이전에, 우리가 어떤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하는지 일깨우는 공적 자산이기 때문이다.
동학농민혁명은 끝난 사건이 아니다.
그 정신은 여전히 오늘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사람을 하늘처럼 여긴다는 사상, 억압과 차별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마음, 공동체의 정의를 위해 행동하려는 의지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렇기에 그 정신을 담은 기록 역시 지금 여기의 의미를 갖는다.
조부의 이름을 세계기록유산의 자리에서 다시 만나는 일은, 결국 과거를 기리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계승할 것인지 묻는 일이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조용히 생각한다. 기록은 사라지지 않으며, 올바르게 남겨진 이름은 끝내 시대를 건너 우리 앞에 다시 선다는 사실을.
동두천시민 최총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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