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와 즐겁게 살리라… 귀락마을이 전하는 600년의 메시지








지명은 기억이다. 누군가 이름을 붙인 순간의 감정, 그 땅에 깃든 사람들의 바람, 세월이 켜켜이 쌓인 이야기가 두세 글자 안에 압축되어 있다. 그래서 지명이 사라지면 단순히 호칭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모든 기억이 함께 지워진다.
의정부시 자일동 끝자락, 포천과 경계를 맞댄 곳에 '귀락(歸樂)'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 있다. 돌아올 귀(歸), 즐거울 락(樂). 돌아와서 즐겁게 살겠다는 뜻이다. 약 350년 전 평안도사를 지낸 관료 박해균이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의 산세와 물길에 마음을 빼앗기며 붙인 이름이다. 그 이름이 지금까지 살아있다.
◇ 낙향, 패배가 아닌 선택
박해균의 이야기를 현대적 시각으로 읽으면 흥미롭다. 그는 관직을 잃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물러난 자리에서 패배감 대신 즐거움을 찾았다. 마을 이름에 '귀(歸)'를 쓴 것은 단순한 귀향이 아니라 자발적 선택의 선언이고, '락(樂)'을 붙인 것은 그 선택에 대한 긍정이다.
조선 시대 사대부에게 낙향은 복잡한 의미를 가졌다. 정치적 실패의 상징이기도 했고, 때로는 절개를 지키기 위한 자발적 은거이기도 했다. 박해균이 어느 쪽이었는지는 기록이 충분하지 않아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가 이 땅에 붙인 이름만큼은 분명한 태도를 담고 있다. 돌아온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 이곳에서의 삶을 즐겁게 살겠다.
그 태도가 350년을 건너 지금 우리에게 닿는다.
◇ 600년의 길목
귀락마을의 역사는 박해균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 마을이 형성된 것은 약 600년 전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 평안도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향할 때 반드시 거쳐야 했던 길목이었다. 나지막한 산맥과 능선을 넘어 오가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었고, 그 교류가 촌락의 씨앗이 되었다.
길목이라는 것은 단순한 지리적 위치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고, 이야기와 이야기가 교차하는 곳이다. 평안도에서 한양으로 향하던 선비들이 이 능선을 넘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과거 급제의 꿈을 품고 올라가던 발걸음과 낙방의 허탈함을 안고 내려오던 발걸음이 같은 길을 밟았을 것이다.
그 길 위에 마을이 생겼다. 이씨와 전씨 가문이 터를 잡고, 학문을 가르치는 우학재가 세워지고, 세대가 쌓이며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600년이라는 시간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그 땅에서 태어나고 살다 간 수많은 사람들의 생애가 중첩된 두께다.
◇ 구전이 살린 이름들
'귀락이', '귀내기', '귀래기'.
공식 지명 귀락(歸樂)이 주민들의 입을 거치며 변형된 이름들이다. 한자의 뜻과 음이 세월과 함께 구어적으로 녹아들어 만들어진 향토적 변형이다. 이 이름들은 문헌에 기록된 역사와 달리, 살아있는 사람들의 언어 속에서 숨 쉬어온 역사다.
지명의 구전 변형은 단순한 발음의 변화가 아니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지명을 자신들의 것으로 소화하고 내면화한 흔적이다. 공식 기록이 없어도, 비석이 없어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름이 있는 한 마을의 기억은 살아있다.
1994년 12월 25일, 귀락마을 주민들이 유래비를 세운 것은 그 구전의 기억을 돌에 새기는 작업이었다. 시정 기록과 원로들의 증언을 고증하고, 향토 조력자들의 글씨로 새긴 비석. 크리스마스에 마을의 역사를 기록한 주민들의 선택이 지금 생각해도 각별하다. 그날 그들이 세운 돌 하나가 600년의 기억을 붙잡아 두었다.
◇ 경계에 있다는 것의 의미
귀락마을은 의정부의 최동북단이다. 포천과 경계를 맞댄 곳. 행정 구역상으로는 의정부에 속하지만, 지리적으로는 포천의 생활권과 더 가깝다. 경계에 있다는 것은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두 곳을 모두 품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도 그랬다. 평안도와 한양을 잇는 길목. 두 세계의 경계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교류하고 정착했다. 경계는 종종 변방으로 취급받지만, 실은 가장 많은 이야기가 교차하는 곳이다.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는 지금, 귀락마을 같은 경계의 자연부락들은 이중의 위협에 처해있다. 개발의 압력과 행정적 무관심. 어느 지자체도 경계 지역의 역사 보존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운 구조적 현실이 있다. 의정부도 포천도 아닌 곳, 그 틈새에서 600년의 기억이 조용히 희미해져 가고 있다.
◇ 지명이 사라지면 무엇이 남는가
최근 몇 년 사이 전국 곳곳에서 오래된 지명들이 사라지고 있다. 개발 사업으로 마을이 철거되고,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수백 년 된 이름 대신 브랜드 이름이 그 자리를 채운다. 'OO파크', 'OO힐스', 'OO자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름들이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이름들을 지운다.
귀락(歸樂)이라는 이름이 사라진다면 무엇이 남는가. 350년 전 한 관료가 이 땅에서 찾은 삶의 철학이 사라진다. 600년 동안 이 길목을 오간 사람들의 기억이 사라진다. 구전으로 전해온 '귀락이', '귀내기', '귀래기'라는 친근한 이름들이 사라진다.
지명을 보존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니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기억하는 일이고, 그 기억 위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생각하는 일이다.
◇ 돌아와 즐겁게 살 수 있는 곳
박해균이 이 마을에 붙인 이름을 다시 생각한다. 귀락(歸樂). 돌아와서 즐겁게 살겠다는 뜻.
이것은 단순히 한 관료의 낙향 선언이 아니다. 어쩌면 이 땅이 가진 본질적인 성격에 대한 직관적 포착이었을지 모른다. 평안도에서 한양으로 향하던 선비들이 이 길목을 지나며 잠시 쉬어가고, 지친 발걸음을 달래고, 다시 길을 나설 힘을 얻었던 곳. 그 쉼과 회복의 기운이 마을의 이름 속에 담겼다.
오늘날 귀락마을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그래서 현재적이다. 우리는 돌아올 수 있는 곳을 가지고 있는가. 경쟁과 성취의 압박 속에서 잠시 내려놓고 즐겁게 살 수 있는 공간을 우리 삶 안에 두고 있는가.
600년 전 이 땅에 모여든 사람들이, 350년 전 이 마을에 이름을 붙인 사람이, 30년 전 유래비를 세운 주민들이 공통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사람에게는 돌아올 곳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돌아옴이 즐거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귀락마을은 그 오래된 진실을 600년째 품고 있다.
메트로포천 양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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